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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서 미래를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28년간 교사를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교장이 되었다 하여 없던 리더십이 생길 리는 만무합니다. 그러니 하던 일을 잘하는 교장이 되겠습니다.” 3년 전 부임했을 때 직원들께 보낸 첫 문자메시지다. 하던 일이란 당연히 수업이었기에 지금까지 부족하나마 수업을 하고 있는 것이고. 새로운 리더십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뜬금없는, 나와 별 관계없는 그것이 나타나지는 않았다고 믿는다. 교육부 공모사업인 학교단위 공간혁신 대상 학교에 선정되면서 전남교육청으로부터 미래형혁신학교로 지정을 받았다. 2016년부터 혁신학교를 운영하며 폐교 위기를 넘어선데다 공간혁신이라는 시대적 화두를 받아든 결과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교직원들은 기대와 함께 걱정도 많았으니, ‘미래’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

나의 이야기 2023.08.25

나를 온전히 받아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슬찬(가명)이의 꿈은 명확하다. “저는 포크레인 기사가 될 겁니다. 자연과학고에 가서 자격증을 따고 아빠처럼 포크레인 기사가 되면 좋겠어요. 직접 멋지게 집도 짓고 예쁜 여자와 결혼도 하구요.” 도움반 단짝 이철(가명)이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지내다 보니 가끔 다투기도 하지만 너나 할 것 없이 먼저 미안하다는 사과부터 하는 친구 사이다. 이철이도 꿈을 이미 정해 놓았다. 택배 사장님이다. 친구들과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택배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직업이다. 한때 경찰관을 꿈꾼 적도 있지만 택배를 하는 부모님을 보니 이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슬찬이가 가끔 자기를 무시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든든한 친구이다. 해먹에 누워 하늘멍 할 때도 좋지만 이렇게 둘이 앉아 도란도란하..

나의 이야기 2023.08.25

그러니, 교장인 나만 잘하면 된다

“심 안드요? 난 귀떼기 떨어지겄소. 징하게 춥네.” 칼바람 부는 겨울 아침에 부실하디 부실한 교장이 교문통에 서 있으니 짠하기도 했으리라. 지금은 퇴임한 심여사님은 우리 학교에서 10년 동안 청소일을 하셨다. 퇴임을 앞두고 가장 아쉬운 것은 “남 차려주는 급식 밥 못 먹어보는 것”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쌀쌀맞은 말투에 겁(?)이 났으나 이내 마음자리가 따뜻하고, 풍류를 사랑하는 멋진 분이란 걸 알고 나서는 이무럽게 지냈다. 회식 자리에서 멋지게 뽑던 노랫가락과 송별회에서 펑펑 울던 기억이 또렷하다. “학교 울타리에 존재하는 모든 어른들은 다 선생님이다.” 모든 교직원들이 같은 명함을 공유하면 좋을 듯하여 교장 부임 첫해 스승의날을 기념하여 이벤트 명함을 제작하여 한 세트씩 선물로 돌렸는데 우리 심여사님..

나의 이야기 2023.08.25

학교,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곳

분주한 아침, 한 대의 자동차에서 두 아이가 내리면 엄마는 한참 본관에 걸린 국기를 바라보다 다시 차에 오른다. 이역만리 어머니 나라를 떠나 가정을 이뤄 살고 있지만 한시도 잊은 적 없는 모국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그 마음을 알아준 학교에 대한 고마움 아니었을까? 학교는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고, 모두에게 따뜻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종교, 국적, 성별, 이념 등 모든 차이에 앞서야 하며 교육과정으로 실행해야 한다. 우리 학교에는 필리핀, 캄보디아, 베트남 국기가 태극기와 함께 사이좋게 걸려있다. 짐작한 대로 우리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어머니 나라 국기들이다.다. 해당 다섯 가정의 동의를 얻어 여러 나라의 국기를 게양한 이유는 분명하다. 학교에 들어서면 누구나 저마다의 빛깔로 빛나게..

나의 이야기 2023.08.25

짱구쌤은 교장샘을 몇 번 해봤어요?

#1 모래 씨름장 “짱구쌤, 짱구쌤은 교장샘을 몇 번 해봤기에 그렇게 잘해요.” “하하, 근데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실내화도 잘 빨고 드릴도 잘하잖아요.” “응, 그래. 교장샘은 처음이지만 교장질은 여러 번 했어.” #2 정자 1학년 한 녀석이 시원한 레몬아이스티를 대접받고 돌아서서 말한다. “짱구쌤, 세상이 참 따뜻해진 것 같아요.” “그래. 살다 보면 따뜻한 일 참 많단다.” “그러니까 모두 반 팔을 입고 다니잖아요.” “.....” #3 도서관 앞 “2024년 새집을 짓다!” 도서관 외벽에 걸린 학교 개축 관련 현수막을 한참 보던 꼬맹이가 진지하게 묻는다. “짱구쌤, 새들이 얼마나 많이 살기에 집을 그렇게 오랫동안 지어요?” #4 명상숲 흔들그네 점심 후 커피를 들고 소란스러운 녀석들을 피해 ..

나의 이야기 2023.08.25

너를 만나기 위해 공룡이 다 멸종했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 / 김상욱 / 바다출판사] 건축가 유현준의 “건축가가 본 교육은, 역사는, 사회는?” 이런 표현이 멋져 보였다. 획일화된 학교 건축이 바뀌지 않으면 교육과 사회가 더 나아질 수 없다는 그의 결론은 그래서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누구나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볼 줄 알아야, 세상은 무채색의 평면에서 다양성을 가진 입체로 변화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물리학자다. 그것도 인문학 소양을 풍부하게 갖춘 친절한 과학자다. 그런 그가 원자에서 인간까지 세상 모든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펼친다고 하기에 주저 없이 주문한 책이다. 상당한 수의 과학책을 구입해서 읽었지만 난 아직도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을 아이들에게 설명하지 못한다. 내가 이해하지 못했으니 설명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책이야기 2023.08.17

모든 삶은 흐른다

철학책이 자기계발서를 자처하면 [모든 삶은 흐른다 / 로랑스 드빌레르 / FIKA] 도열한 추천인들 Hooked on classics는 로얄필이 클래식 입문자를 위해 내놓은 메들리 앨범이다. 내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은 이 앨범을 감상 시험의 교재로 사용했고 덕분에 충장로 레코드샵에서 구입해서 마르고 닳도록 들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로얄필이나 음악 선생님의 의도는 선한 것이어서 나 같은 음악 문외한에게 클래식의 재미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을 것이지만, 반대 급부도 만만치 않아서 클래식의 깊이보다는 익숙한 크라이막스만 들으려는 얇은 귀를 양산하기도 했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추천인이 책의 머리를 장식할 때 알아보아야 했지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철학책을 선택한다면?” 등의 카피에 훅한 내 얄팍함을 탓해야 한다..

책이야기 2023.08.05

밑줄이 없어도 아무렇지 않은

밑줄이 없어도 아무렇지 않은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 마쓰이에 마사시 / 비채] 일본 현대문학의 정통성 고도 경제성장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안이한 자기 과시욕에 구애되지 않고, 실질적이면서도 시대에 좌우되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닌, 그러면서도 사용하기 편리한 건물을 무라이 슌스케는 하나하나 만들어내고 있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작가의 전작에 나오는 위의 문구처럼 그 무엇에 구애받거나 좌우되지 않은 작품이었다. 작가가 일본에서 가장 사랑하는 땅, 홋카이도의 어느 가상 마을을 배경으로 3대 100년의 이야기를 12명의 인물과 4마리의 홋카이도 개를 주인공으로 담담하게 펼쳐 보인다. 일본 현대문학의 정통성으로 부른다는데, 우리 문학의 누구쯤 될까를 생각해 봐도 딱히 맺어지지는 않는다. 김..

책이야기 2023.08.02

내 인생의 음악 편지

내 인생의 음악 편지 [우리가 하려고 했던 그 거창한 일들 / 이종민 엮음 / 걷는사람] 행복한 사람, 이종민 딱 내가 해보고 싶은 일들이었다. 가르치는 일을 무사히 하다 퇴임하기, 음악 매일 듣기, 좋은 사람들과 술 자주 마시기, 애틋한 사람들과 편지 나누기, 시골집에서 마음대로 살기, 읽고 쓰기. 그리고 이렇게 [내 안생의 음악 편지]처럼 여러사람들을 부추겨 정년 퇴임 책 출판까지, 어느 것 하나 부럽지 않은 것이 없다. 전북대 영문과 교수, 전주한옥마을을 키운 문화기획가, 시민사회활동가로 마당발을 과시해온 그가 2년 전, 정년 퇴임을 앞두고 지인 116명에게 [내 인생의 음악 편지] 원고를 받아 출간한 책이다. 각자의 인생 스토리가 깃든 음악을 소개하는 편지는 그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장르를 포괄한다..

책이야기 2023.08.02

전라도 말은 살아있다

[그라시재라 / 조정 / isonomia] 아따 그 말이 그럴 듯 하시 오늘은 미암떡이 선생이시 시인은 영암 출신이다. 어릴 적 동내 할머니들 틈에서 들은 이야기를 사투리 그대로 기억해서 쓴 서남 전라도 서사시다. 30여년 전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은 그 작품성과 함께 찰진 전라도 보성사투리로 우리 문학을 한 단계 올려놓더니만, 이제 온전히 사투리만으로 웃음과 감동을 선사한 조정 작가는 진짜배기 ‘라도’사람이라 부를만 하다. 개인적으로는 처가인 영암에서 13년을 살았고 지금도 장모님이 그곳에 계시니 시집에 나오는 거의 모든 말들은 무척 살갛고 이무럽다. 동네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한 미암떡이 오늘은 용케도 모두가 잘 모르는 말을 그럴듯하게 해석하자, 동네 성님들의 칭찬이 쏟아진다. “오늘은 미암떡이 선생이..

책이야기 2023.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