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전라도 말은 살아있다

짱구쌤 2023. 7. 11. 13:29

[그라시재라 / 조정 / isonomia]

 

아따 그 말이 그럴 듯 하시 오늘은 미암떡이 선생이시

시인은 영암 출신이다. 어릴 적 동내 할머니들 틈에서 들은 이야기를 사투리 그대로 기억해서 쓴 서남 전라도 서사시다. 30여년 전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은 그 작품성과 함께 찰진 전라도 보성사투리로 우리 문학을 한 단계 올려놓더니만, 이제 온전히 사투리만으로 웃음과 감동을 선사한 조정 작가는 진짜배기 라도사람이라 부를만 하다.

개인적으로는 처가인 영암에서 13년을 살았고 지금도 장모님이 그곳에 계시니 시집에 나오는 거의 모든 말들은 무척 살갛고 이무럽다. 동네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한 미암떡이 오늘은 용케도 모두가 잘 모르는 말을 그럴듯하게 해석하자, 동네 성님들의 칭찬이 쏟아진다. “오늘은 미암떡이 선생이시.” 그렇다, 도처에 나를 넘어서는 선생들이 수두룩하다.

 

자네 큰 아들이 참 성건지네 저도 살기 팍팍할 텐디 여동상을 중학 보낸다고 대처로 데레가기가 보통 맘인가

겨우 초등학교만 보낸 큰아들은 스무 살까지 농사로 집을 거들더니 도시로 나가 겨우겨우 사는 처지에도 여동생을 책임져서 가르치겠다고 데려간단다. 며느리한테도 미안한데 엄니 그것 아니요 대처에 가봉께 인자는 여자도 배와야것습디다 애기씨가 총명항께 잘 하꺼시오라며 이쁜 말로 되받는다. 도시로 나가 미싱으로 막노동으로 식구들을 건사하며 힘들게 살았던 농촌의 자식들 이야기가 너나없이 한 사연들이다. 자기 살기도 팍팍했을 봉순이 큰오빠의 성건진 마음이 어매는 더 아프다.

 

그랑께 성님 내가 죽어도 낯들고 그 애기를 못 만낼 거시오 엄니 총소리 탕 나먼 나 한 번만 돌아봐주소 소리가 인자는 총소리보다 더 무서와라 성님 그라고도 내가 이 목구녀게 밥 밀어 넣고 사요

월출산 아래 옹기종기 자리 잡은 이곳에서도 좌우익의 대립을 피해 가진 못했을 터, 집집마다 안 아픈 역사가 없다. 살아남은 할매들은 자식들과 이웃들을 먼저 보낸 세월이 켜켜이 쌓여도 죄짓는 마음은 갈수록 커 가고, 함께 위로하며 건너는 수밖에 없었다. 푸르던 딸이 부역 협력자로 끌려가고 따라오는 엄마에게 한 번만 돌아봐 주라 울먹인다. 세상 제일 무섭고 살 떨리던 시간에 딸의 마지막 순간을 돌아보지 못한 어매는 이렇게 살아남아 살겠다고 밥을 넘기는 자신을 쥐어뜯는다. 비켜 가지 못한 아픈 역사를 그 사람들의 말로 옮기는 것은 누군가에게 기록되고 평가받는 역사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만든다. 저자의 이 책을 서남 전라도 서사시라 부르는 이유다.

 

긍께 이 사람아 딸이라고 우섭게 이름 지어주먼 쓰꺼싱가 모레가 장날잉께 영감님 장보러 나서거든 메느리 본대서 청하소 우리 손지딸 착허고 커서 부자 될 이름 한나 지어 오시쑈허고 말이여

딸을 낳고 석달이 지나도록 이름을 안 지어주는 시아버지께 장에 갈 때 이름 좀 지어와 달라고 조심스레 말을 꺼낸 며느리에게 시아버지, “뭔 딸 이름을 돈 주고 짓는다냐?” 속 없는 며느리라고 타박하는 시어머니 월출네한테 동네 성님들이 한마디씩 한다. 그러면 못 쓴다고. 딸들도 아들같이 대해야 한다고. 시들은 주로 아낙들을 주인공으로 한 탓에 자연스레 성과 노동 차별이 곳곳에 드러난다. 우리네 한의 역사가 여성의 역사이듯 웃으며 읽는 시의 행간에서 여러 번의 머뭇거림이 있었다.

 

전라도 말은 살아있다

가끔 사투리를 주저하고 서울말로 이야기하려는 나를 본다. 자기검열이다. 어렸을 때부터 몸에 익은 이런 식의 주저함은 내내 삶에서 불현듯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며 정체성과 자존감을 흔들었을 것이다. 특히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선생이 자기 땅의 말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다면 난 뭣 때문에 이곳에 있는 것일까?

편집자의 바램처럼 이 글이 교과서에 실린다면? 말들은 무중력으로 우리를 그곳으로 이끌고 그때의 사람들과 만나게 할 것이다. 아이들은 할머니와 이웃을 찾을 것이며 우리의 빛깔은 더욱 선명하게 빛날 것이다. [전라도 촌스러움의 미학] 이후로 최고의 우리말 길잡이를 만났다. 아니 올해 최고의 책을 만났다.

2023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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