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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래기와 수세미가 걸린 학교 수돗가

“어린 사람들을 가르치는 건 처음이었어요. 3학년분들이 글쓰기를 어려워한다는 것도 잘 몰랐어요.” 칩코는 시종일관 아이들에 대해 경어를 사용했고, 웃음은 떠나지 않았다. 칩코는 작년 우리 학교에서 생태텃밭교육을 담당해 주신 청년 농부 선생님이다. “우당당탕 텃밭교실” [2022년 생태텃밭교육 공유회]라는 낯선 행사에 참석했다. 방중이라 땡땡이를 치고도 싶었지만 3학년 선생님은 이런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잊을만하면 오늘의 행사를 상기시켜주었다. “많은분들이 참석했으면 좋겠어요.” “아가씨 대기중”이라는 대담한 네온사인이 걸린 가요주점 2층 작은 도서관에는 교사, 학부모, 지역민, 생태텃밭 활동가, 아이들 등 30명이 넘게 모였고 온라인 중계도 했다. 동근과 상글, 이 보기 좋은 부부는 오늘 행사의 주최자이..

나의 이야기 2023.01.31

긍게 사램이제

[아버지의 해 방일지 / 정지아 / 창비] 산림조합 장례식장 우선 익숙한 지명이 등장한다. 소설의 무대가 구례인 탓이다. 구례중앙초를 나온 주인공 모녀는 문척 다리를 건너다녔고, 오거리 수퍼에서 담배를 나눠 피웠으며, 아버지의 마지막은 산림조합 장례식장이었다. 그곳에서 3일간 치른 장례가 소설의 주된 이야기이다. 4년을 빨치산으로 살다 위장 자수, 투옥, 재수감을 거쳐 평생 ‘빨갱이’의 천형을 안고 산 아버지가 치매를 앓다 전봇대에 부딪혀 죽는다. 장례식장을 찾은 사람들과 얽힌 이야기는, 얼핏 무거울 거란 우려를 씻고 시종 유쾌하고 감동적이다. 작가의 내공이다. 빨치산의 딸 1988년에 읽은 이태의 [남부군], 1989년의 [태백산맥]은 반쪽짜리 역사를 거부하던 청년학도에겐 새로운 세상이었다. 남북 양쪽..

책이야기 2023.01.30

나무가 되고 싶은 사람들

나무가 되고 싶은 사람들 [어제를 향해 걷다 / 야마오 산세이 / 상추쌈] 7,200살 야쿠시마 조몬삼나무 일본 남부 야쿠섬에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조몬스기가 있다. 최소 수령 2,800년에서 최대 7,200년까지 추정하는 삼나무로 섬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지은이의 표현대로라면 부처의 해탈과 예수의 부활 훨씬 이전부터 이 세상에 나와 지금까지 건재하다. 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의 주무대도 이곳 야쿠섬의 숲과 나무들이다. 도쿄 태생의 지은이는 가족들과 함께 이곳 야쿠섬에 들어와 25년간 생활하며 ‘원고향’, ‘자연생활’의 철학을 실천한다. 생태운동가이자 시인인 지은이에게 7,200살 조몬삼나무는 영감의 원천이다. 과학과 서양으로 대변되는 미래와 진보에 대하여, 조금 부족한..

책이야기 2023.01.26

오르한 파묵

책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며 [오르한 파묵 / 이난아 / 민음사] 작가는 바늘로 우물을 파듯이 남은 생애를 수도승처럼 방 한구석에서 (글을 쓰며) 보낼 수 있다.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첫째도 인내요, 둘째도 인내요, 셋째도 인내. 작가는 바늘로 우물을 파듯이 글을 써야 (31쪽) 32년을 매일같이 평균 열 시간 이상을 꾸준하게 썼다고 한다. 작가 조정래와 황석영은 이를 ‘글감옥’이라 했고, 하루키는 ‘직업으로서 소설가’라 규정했다. 임윤찬도 그랬다. 반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을 차지한 후, “올해 들어 가장 심란한 마음, 산에 들어가 피아노만 치고 살고 싶다.”라고 했다. 19살 청년은 작은 성취에도 자랑하고 싶은 마음만 앞서는 나를 부끄럽게 했다. 작가 김훈이 확인 사살을 한다. “생사의 급박함을..

책이야기 2022.09.20

감수성에 대하여

비올 때는 쨍쨍한 해가 그립고, 복날 지나 뙤약볕에 서니 지난 주에 1학년 아이들과 했던 비오는날 운동장 걷기 수업이 간절하다. 발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차가운 모래의 감촉과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귀기울이는 시간은 내내 기억된다. 통나무 밑둥에 올라 까르르대며 저마다의 폼으로 한껏 멋을 부리는 청춘들은 아름답다. 감.수.성.이다.

나의 이야기 2022.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