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밑줄이 없어도 아무렇지 않은

짱구쌤 2023. 8. 2. 17:20

밑줄이 없어도 아무렇지 않은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 마쓰이에 마사시 / 비채]

 

 

일본 현대문학의 정통성

고도 경제성장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안이한 자기 과시욕에 구애되지 않고, 실질적이면서도 시대에 좌우되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닌, 그러면서도 사용하기 편리한 건물을 무라이 슌스케는 하나하나 만들어내고 있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작가의 전작에 나오는 위의 문구처럼 그 무엇에 구애받거나 좌우되지 않은 작품이었다. 작가가 일본에서 가장 사랑하는 땅, 홋카이도의 어느 가상 마을을 배경으로 3100년의 이야기를 12명의 인물과 4마리의 홋카이도 개를 주인공으로 담담하게 펼쳐 보인다. 일본 현대문학의 정통성으로 부른다는데, 우리 문학의 누구쯤 될까를 생각해 봐도 딱히 맺어지지는 않는다. 김훈, 이청준, 조정래, 황석영, 박경리 등 쟁쟁한 대가들과는 확실하게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우리 작가들은 선 굵은 스토리를 선호하는 반면 이분은 디테일을 중시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담담한 서사라고 하는 가 보다. 우열을 가릴 수 없다.

 

밑줄과 접힘이 없는

작가의 전작 두 편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다시 살펴보니 곳곳에 밑줄과 접힘이 있다. 마치 의도를 한 것처럼 좋은 문장과 인물 묘사를 곳곳에 숨겨두었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너무 깨끗해서 이상했다. 자극적인 음식에 자꾸 노출되다 보면 심심한 음식은 절로 멀리하게 되는데 문장도 그런 것 같다. 하지만 특별한 자극이 없는데도 책은 재미있게 읽힌다. 아마도 등장인물들 모두에게 고루 돌아간 스포트라이트 때문일지 모른다. 주연과 조연의 차이가 사연에 있다면 네 마리의 홋카이도 견에게도 하나하나 스토리를 만들어 준 작가의 의도는 성공으로 보인다. 매운맛 전성시대에도 사찰 음식의 자리는 필요하듯, 아니 오히려 더욱 굳건해지는 것과 같다.

 

대담한 서사 vs 담담한 서사

노벨상 작가 마르케스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거장으로 불린다. 그의 대표작인 백 년의 고독은 1005대에 걸친 부엔디아 가문의 이야기다. 가계도를 옆에 두지 않으면 도무지 헷갈리는 방대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실제와 환상을 오가며 현란하다. 한동안은 그런 대담한 서사에 끌려 찾아다니며 읽기도 했었다. 그 정점은 아마도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으로 이어진 조정래의 연작 대하소설일 것이다. 평생 한 편도 쓰기 힘들다는 대하 소설을 세 편이나 쓰는 대가의 집념과 스케일은 지금도 놀랍다. 요즘 작가들에겐 찾아보기 힘든 긴 호흡은 분명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비빔냉면과 물냉면 말고도 콩국수가 있어야 우리의 여름이 더욱 풍성하지 않는가?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책은 시종일관 담담하지만 일어나는 일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늙음, 죽음, 치매 등 소멸에 대해 덤덤히 예외가 없다. 누구나 집으로 돌아가야 하듯 말이다. 원제는 빛의 개쯤인데 번역가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소멸을 점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나이에도 여전히 성장과 생산이 훨씬 잘 어울리는 세대들과 지낼 수 있는 것은 축복이다.

202382일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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