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모든 삶은 흐른다

짱구쌤 2023. 8. 5. 22:38

철학책이 자기계발서를 자처하면

[모든 삶은 흐른다 / 로랑스 드빌레르 / FIKA]

 

도열한 추천인들

Hooked on classics는 로얄필이 클래식 입문자를 위해 내놓은 메들리 앨범이다. 내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은 이 앨범을 감상 시험의 교재로 사용했고 덕분에 충장로 레코드샵에서 구입해서 마르고 닳도록 들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로얄필이나 음악 선생님의 의도는 선한 것이어서 나 같은 음악 문외한에게 클래식의 재미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을 것이지만, 반대 급부도 만만치 않아서 클래식의 깊이보다는 익숙한 크라이막스만 들으려는 얇은 귀를 양산하기도 했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추천인이 책의 머리를 장식할 때 알아보아야 했지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철학책을 선택한다면?” 등의 카피에 훅한 내 얄팍함을 탓해야 한다. 어떤 한 줄 서평의 말처럼 철학책을 가장한 자기계발서처럼 읽혔다. 물론 자기계발서를 낮은 수준의 책이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고 그 역할이 다르다는 뜻이다. 한 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자기계발서도 없을 테지만 철학책은 더욱 그렇다.

 

바다에 대한 예의

바다에서 철학과 삶을 배우라는 저자의 뜻을 그대로 존중하더라도 억지 춘향이 곳곳이다. 바다와 대양, 밀물과 썰물, 소금, 항해까지는 그렇다 해도 방파제, 선원, 빙하, 상어, 등대, 모비딕, 세이렌에 이르러서는 바다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 했다. 모든 철학적 언어는 충분치 않아서 은유적 표현만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는 저자의 엄살은 사실 바다에 갖다 붙이기를 위한 장치처럼 들렸다. 내가 좋아하는 심리학자 정혜신은 옳은 말에 맞아 죽은 사람이 그른 말보다 만 배는 많다고 했다. 프랑스 친절한 철학자의 바른말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겠지만 자기계발서의 쉬운 정답처럼 느껴졌다.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30년 가까이 교단에 있던 후배가 명예 퇴임을 한다고 해서 함께 식사를 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쉬운 길이 아니었기에 기꺼이 그의 명퇴를 축하해주고 새로운 출발에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생태적 삶을 교육에 실현하고자 애쓴 후배의 긴 교육자의 길을 잘 알고 있기에 이제 그만큼 했으면 충분하다고 말해주었다. 후배는 아쉬움과 회한을 이야기했다. 하고 있는 일의 마무리를 걱정했고 남은 이들에게 미안함을 내비쳤지만, 그의 길이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 강물의 치열함이었음을 오늘 모인 모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조금 쉬었다가 덜 쓰고, 더 느리게, 더 소박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사는 보성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재미있게 하고 싶다고도 했다. 전남생태교육의 기획가이자 실천가, 박향순 선생님이다.

 

모든 것을 받아들여서 바다입니다

내가 아는 바다에 관한 가장 큰 가르침은 신영복 님의 경구 모든 것을 받아들여서 바다입니다.”이다. 아래로 흐르고, 다 함께 흘러서 마침내 도달하는 바다의 다양성과 평등성, 그리고 포용이다. 프랑스 저자의 바다 이야기가 삐딱한 독자의 딴지에 주춤거릴테지만 그것도 넘어서 담아내는 것이 바다이니 이 책은 그 값어치를 충분하게 했다.

202385일 이장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