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102

완전 소사네, 쏘사리!

학교에서 순천 집까지 멀지도 않은데 왜 이리 자주 안 와? 거기서 뭐해? 관사에서 머무는 날이 늘어나자 아내가 묻는다. 응, 할 일 많아. 저녁 식사하고 성능 좋은 랜턴 들고 교정을 두어 바퀴 산책하고 사무실에서 책 좀 읽다가 들어와. 심심하면 목공실에서 작은 소품이라도 하나 만들고. 자고 일어나서 학교를 한 바퀴 돌아, 길냥이들 먹이도 주고, 전원을 올리고 세콤을 해제한 후 우유를 냉장고 앞에다 옮기지. 제빙기를 돌리고 블루투스 스피커를 밖으로 내놓고 아침맞이를 하지. 근무 시간 중에는 가끔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고 주무관님과 눈이 맞으면 뭘 고치든지 설치하든지 일을 하지. 완전 소사네. 이소사, 쏘사리. 맞아, 소사! 쏘사리 좋다. 가장 사랑하는 시간은 6시쯤이다. 취사 버튼을 눌러두고 다락 정자에 앉..

나의 이야기 2023.08.25

가을 우체국 앞에서♬

우리 학교와 YB라는 이니셜이 같은 윤도현의 명곡 [가을 우체국 앞에서]를 참 좋아한다. 노~란 은행잎들이 깊게 드리워진 우체국을 생각하면 그 자체로 웃음이 나온다. 교장실 유리창으로 용방 우체부 아저씨가 나타나면 예외 없이 가슴이 뛴다. 10중 7~8은 한겨레신문만 배달 되지만 나머지 2~3 때문에 매일 목을 빼고 기다린다. 용방우체국은 학교에서 200M 거리에 있어서 걸어서도, 퀵보드로도 순식간에 다녀올 수 있다. 직원들 말로는 아마도 우체국을 전국에서 가장 많이 이용하는 교장일 거라고 할 만큼 뻔질나게 드나든다. 대부분 월간 [용방살이]를 발송하거나 우표를 사러 간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두 편의 손 편지를 받고 보낸다. 대부분 오래 전 제자들이거나 옛 동료들이다. 가끔 학교로 찾아오는 제자들이 가장..

나의 이야기 2023.08.25

누가 교장샘을 묻어도 몰라요^^

순천에 있는 집까지 30분 거리이니 매일 출퇴근도 가능하지만 난 관사에 있는 시간이 좋다. 텅 빈 학교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맘껏 즐기고 노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큰 소리로 음악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해서 효율로 보자면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을 리 만무한 라디오는 항상 켜져 있었다. 그 좋은 음악을 오디오 음량의 1/3도 올리지 못하고 듣는 아파트 생활이 만족스러울 리 없었으니 자연히 이곳 관사에서 머무르는 시간은 늘어날 수 밖에. 이른 저녁을 먹고 8시까지 클래식 FM [세상의 모든 음악, 전기현입니다]를 끝까지 듣고 나면 장르 불문, 가수 불문의 음악 감상이 시작된다. 깊은 소리를 자랑하는 송가인의 「서울의 달」을 듣고, 존 바에즈를 거쳐 송창식까지 와야 1부가..

나의 이야기 2023.08.25

가장 강력한 라이벌은 양보할 생각이 없다

일흔이 넘었지만 남에게 하대를 하는 일이 없다. 언제나 첫 일은 농기구를 들고 운동장을 도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네 밑에 파인 모래를 채우고, 유치원 놀이터에 난 풀은 뽑아낸다. 교정을 한 바퀴 돌고서야 사무실로 들어간다. 우리 학교 배움터 지킴이 칠*샘이다. 교사로 정년퇴직을 하셨고, 내가 아는 지인의 표현을 빌리면 마지막 해까지 교무부장를 하며 봉사하셨던 분이다. 인근 광의면에서 농사지으며 우리 학교 지킴이를 겸하신다. 특히 하교 시간 3차례의 에듀버스 통학을 안전하게 살펴주시니 더 바랄 게 없다. 난 퇴임하면 집에서 맘껏 놀면서 지낼 계획이었지만 칠*샘을 가까이에서 뵙고 난 후론 약간 생각이 바뀌었다. 잠깐씩 아이들을 보러 학교에 나오는 것이 나쁘진 않을 것도 같다. 아이들을 보면 없던 기운도 생기..

나의 이야기 2023.08.25

걱정하지 마, 선생님이 널 어떻게 하겠냐?

오늘은 유독 추운 날이다. 이런 날에는 채비가 중요하다. 어제 충전해 놓은 손난로부터 확인하고 자전거 마라톤 기념품인 복면(마스크)과 스키용 장갑까지 끼워 줘야 한 시간을 견딜 수 있다. 그리고 너무도 사랑스런 하만 카든 스피커를 핸드백처럼 들고 도서관 앞으로 나간다. 태블릿에서 KBS 라디오 앱을 켜면 클래식 FM에서는 이제후 아나운서의 “출발 FM과 함께”가 교정에 퍼진다. 이젠 열을 올리기 위해 무한 걷기가 필요하다. 아이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10분 정도 주차장을 빠르게 걷노라면 오늘도 가장 먼저 원*이네 쏘나타를 만날 수 있다. 채 잠이 덜 깬 원*이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나면 곧이어 몽*네 K8이 들어오지만 몽*는 바로 내리지 않고 한참을 정차한다. 부스스한 머리의 몽*와도 악수를 나누면 1차 에..

나의 이야기 2023.08.25

아쉬움 가득한 마지막 출근길

8월의 마지막 날이다. 오늘 가게 되는 체험학습에 대한 기대가 앞서겠지만 통학차에서 내리는 몇몇 아이들은 아쉬움 가득한 얼굴이다. 때마침 출근길 교감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자 어느새 달려가 팔을 붙든다. 안 가면 안 되나요? 우리랑 같이 졸업하기로 했잖아요? 교감 선생님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내일부터는 다른 학교로 가야 한다. 교장 승진을 당연히 축하해야 하지만 아이들 마음만큼이나 나 역시 마음이 여간 심란한 것이 아니다. 교감 선생님은 우리 학교와 오랜 시간 인연을 맺은 분이다. 교사 시절 혁신학교를 운영하며 폐교 직전의 학교에서 학생을 유치해야 하는 과업(?)도 수행했고, 몸소 멀리 사는 조카를 데리고 와서 실질적인 학생수 늘리기에도 기여했다. 4년의 고된 혁신학교 생활을 마치고 교감으로 승진하여 청산도..

나의 이야기 2023.08.25

새들의 맛집을 아시나요

심여사님은 날씨가 멀쩡한데 우산을 쓰고 등교하신다. 여사님! 뭔 일이다요? 아이고 이놈의 까치땜에 못 살것소. 사연인즉 이렇다. 여사님의 등굣길은 학교앞 벚나무 터널을 지나와야 하는데 그곳에는 사납기로 유명한 물까치들이 집을 짓고 산다. 겉보기에는 아름답고 멋진 물까치지만 떼 지어 다닐 때면 까마귀들도 줄행랑을 치는 쌈닭 중의 쌈닭이다. 이 녀석들의 둥지를 지날 때면 특별한 주의가 필요한데 특히 어린 새끼가 있을 때 그렇다. 인간이 나타나면 서로 간에 주의보를 발령하고 이리 저리 날뛰며 접근을 막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접근하는 인간은 머리를 쪼고 도망가는 물까치의 공격을 감당해야 한다. 관사에서의 아침은 너무도 일찍 깨어나는데 주로 새벽부터 일 나오는 어른들의 경운기 소리와 운동장을 휘젓는 각종 새들의..

나의 이야기 2023.08.25

혁신학교를 넘어 혁신학급으로!

4학년 역시 2주에 한 번은 수업을 하고 있으나 주로 운동장에서 이뤄져서 교실을 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 마침 수업 공개가 있어서 뒤에 앉아 비교적 꼼꼼하게 교실을 살펴볼 수 있었다. 교실 뒤편에 매트가 깔려 있고 편안한 소파와 쿠션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실내용 해먹, 보드게임과 그림 블록 등 놀이 도구도 잘 갖춰져 있었다. 우리 학교 에이스들의 교실답게 11살 멋쟁이 여학생들의 취향과 패션니스타 담임선생님의 센스가 잘 녹아든 교실이었다. 60년이 넘은 노후 건물은 곧 허물어질 것처럼 칠이 벗겨지고(개축이 예정되어 일체의 투자가 중지된 상태) 곳곳이 빈티 가득하지만 교실은 참 포근하고 깔끔하다. 정권과 교육감이 바뀌자 주변에서 가끔 물어본다. 혁신학교가 어찌 될 것 같냐고. 당연히 내가 어찌..

나의 이야기 2023.08.25

공간이 바뀌면 사람도 바뀐다

100년이 넘은 팽나무는 자체로 압도적이어서 우리 학교의 상징으로 삼을만 했다. 교목을 팽나무로 바꾸고 그곳을 학교의 중심으로 가꾸는 마스터 플랜도 만들어졌다. 문제는 정자였다. 2007년에 조성된 옛 정자는 나름 운치가 있었지만 아이들과 어른들은 그곳에 모이지 않았다. 평상 하나만 덩그런 정자는 늘 습했고 팽나무의 운치와 기품을 즐기기엔 많이 부족해 보였다. 정자를 철거하고 다른 시설물을 지어야 하나? 고심 끝에 이야기가 있는 시설물을 철거하기 보다는 보완하기로 결정했다. 먼저 팽나무 정자 리모델링을 알리고 디자인을 공모했다. 학생과 교직원들의 공모가 이어졌고 최종 세 편의 후보를 놓고 투표를 실시하였다. 1안은 다락이 있는 복층 정자, 2안은 벽을 세우는 오두막 카페, 3안은 정자 정비 놀이 시설 추..

나의 이야기 2023.08.25

곳곳에 아지트가 있어야 아이들이 숨을 쉰다

노고단이 잘 보이는 데크 쉼터 옆 그네 의자에 강*이가 있다. 유치원 옆 그네 의자에서도 강*이는 늘 그 자세다. 저렇게 엎드려 다리를 흔들며 책을 읽는다. 누가 지나가도 좀처럼 알지 못한다. 깊이 빠져들어 그 시간에 집중한다. 아이들이 가장 예쁠 때다. 쌍둥이 녀석들은 라탄 의자에서, 4학년 개구쟁이들은 확장된 정자에서, 폰을 사랑하는 두 녀석은 다락 정자에서, 2학년들은 트리하우스에서, 고학년 여학생들은 해먹에서, 댄스를 사랑하는 아이들은 데크 쉼터에서, 승*이와 원*이는 새로 생긴 연못에서 자주 논다. 자기만의 아지트다. 아지트가 모두 그럴싸하게 근사할 필요는 없다. 물웅덩이도, 그냥 쌓아진 모래더미도, 오래된 그네와 구름다리도 아지트가 된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그냥 거기에 가기만 해도 편안하고 ..

나의 이야기 2023.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