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341

클라라와 태양

해가 저한테 아주 친절했어요 [ 클라라와 태양 / 가즈오 이시구로 / 민음사 ] 남아있는 나날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죠.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는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남아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해가 저물 때부터를 가장 좋은 때라고 말하는 소설 남아있는 나날]은 명문가의 집사로 평생 살아오다 은퇴한 스티븐슨을 주인공으로 세운 이야기이다. 노벨상 작가의 작품치고는 소박하다라며 읽었었는데 잔잔하면서도 울림이 작지 않아, 뭐든 스케일로 평가하려는 오래된 습성을 반성하기도 하였다. 관계와 열정으로 채워진 뜨거웠던 해의 시간을 지나 자신에게..

책이야기 2021.05.09

단순하지만 충만한, 나의 전원생활

나는 그날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 단순하지만 충만한, 나의 전원생활 / 벌린 클링켄보그 / 목수책방 ] 완벽하다고 할 뻔 했던 날 지난주에는 거의 완벽하다고 할 뻔했던 날이 하루 있었다. ‘할 뻔했던 날’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정으로 완벽한 날이 이미 내 삶에서 왔다 갔다고 말하기가 싫기 때문이다. 완벽한 날은 언젠가를 위해 남겨 두고 싶다. 하지만 완벽한 날이 온다면 지난주의 그날과 아마 비슷할 것이다. 서쪽에서 산들바람이 불어와 날을 깨끗하고 빛은 투명했고, 우리 농장에는 티끌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451쪽) 6월 30일 저자의 농장에는 벌들이 부지런히 꿀을 모으고, 염소는 우리를 나와 풀을 뜯고, 야생여우 한 쌍이 농장의 닭을 잡아채서 허둥지둥 도망치고, 새벽에 거미줄을 연신 걷어내며 걷다보면 명주..

책이야기 2021.05.05

STONER

넌 무엇을 기대했나? [ 스토너 / 존 윌리엄스 / RHK ] 스토너와 그레고리우스의 평범함 1965년에 발행한 초판 2천부도 다 못 팔고 절판되었던 소설이 40년이 지난 후 재발행 되어 역주행 인기몰이 중이다. 미주리대학 영문과 조교수 스토너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다른 누구 못지않게 풍부한 삶을 살아가는 당신에게” -재발행 카피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스토너는 새로운 영농기술을 배워오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대학에 들어가지만 영문학을 만나 진로를 바꾼다. 고향과 멀어지는 삶에서 결정타는 이디스, 완전히 이질적인 아내를 만나 결혼 생활의 유일한 행복인 딸 그레이스를 얻었지만 사랑해 본 적 없는 부부로 살아간다. 대학 강사 캐서린과의 불꽃같은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

책이야기 2021.05.01

프로보커터

새로운 ‘강준만’이 나타났다! [ 프로보커터 / 김내훈 / 서해문집 ] 프로보커터 ‘도발provoke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말과 글과 영상으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도발하여 조회수를 끌어올리고, 그렇게 확보한 세간의 주목을 발판 삼아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스마트폰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물리적인 시간과 신경쓰임에서도 그렇지만 절로 이마가 찌푸려지는 이슈메이커들의 도발에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포털을 도배하다시피 하는 보수언론의 찌라시 수준의 기사에서는 예외 없이 전문 도발자들이 매일 인용된다. 문제는 정도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더 자극적으로, 더 모멸감을 주는 표현은 이제 그 한계가 없는 듯 보인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듯 이별의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 ..

책이야기 2021.04.25

아웃 오브 아프리카

나이로비의 거리들이 없다면 세상은 없다 [ 아웃 오브 아프리카 / 카렌 블릭센 / 열린책들 ] 30호, 우린 그 자체로 빛나♬ 두 달여 가장 큰 즐거움은 30호 가수에 대한 덕질이었다. TV 가요 경연무대에서 우연히 본 30호를 찾아 유튜브 영상을 섭렵하고 매일 출퇴근을 그의 노래로 보냈다. 가장 최근에 부른 노래는 BTS의 「소우주」 ‘우린 그 자체로 빛나♬’ 가사를 몇 번이고 따라 부른다. 두 번째 즐거움은 이 책을 아껴 읽는 것, 진짜 아껴 읽었다는 표현이 딱이다. 로버드 레드포드와 메일 스트립의 영화 속에서 아름다운 배경으로 존재하던 아프리카를 주인공으로 세운 원작. Out of Africa always something new. 아프리카에서는 항상 무언가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에서 따온 제목처럼 ..

책이야기 2021.02.07

눈표범

‘불확실성 안에서도 위엄 있게 살기’ [ 눈표범 / 실뱅 테송 / 북레시피 ] 잠복 영하30도 5천 미터 고지에서 언제 올지도 모를 눈표범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잠복이다. 새벽 4시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3주간의 잠복을 통해 눈표범을 세 번 만났다. 세상을 지도 삼아 돌아다니기를 즐기던 저자가 말은 고사하고 움직임조차 멈춰야 하는 잠복을 견디는 것은 붓다의 고행만큼이나 고통스러웠으리라. 그렇게 얻은 깨달음은 ‘인내심이야말로 가장 우아하면서도 가장 망각하기 쉬운 최고의 미덕’이라는 배움이다. 2018년 1월 8일(?) 새벽, 영하 12도(순천에서는 경악할)에서 세 시간을 잠복한 적이 있다. 겨울의 진객, 흑두루미의 기상을 관찰하고 그 개체수를 세는 일에 함께했다. 이틀에 한 번씩 그 일을 하는 ..

책이야기 2020.12.26

어른 아이 김용택

힘센 김용택 [ 어른아이 김용택 / 김훈 외 / 문학동네 ] 2008년 회갑 퇴임 예년과는 많이 다른 추석 연휴에 누군가는 걷고 읽고 그렸다는데 난 읽고 쓰고 조금 일했다. 나중에 퇴임하고 나면 그려질 일상이다.(음악 듣기가 추가) 아파트에서 일하기(음악 듣기)는 좀 그래서 시골에 집을 짓는 계획도 마련해 두었다. 그래도 여전한 걱정은 시골 일을 잘 하지 못할 뿐 아니라, 모기나 벌레에 민감한 편이라 그것들이 기승을 부리면 얼른 쾌적한 아파트로 돌아오곤 하는 도시촌놈 기질 때문이다. 2008년 날짜가 적힌 책을 보고서야 김용택 선생이 퇴임한지가 벌써 이렇게 되었구나 하며 새삼 놀랐다. 그해 11월에 사서 읽었으되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었고(역시 기록하지 않은 책은 읽지 않은 것) 따라서 새로 읽는 것과 ..

책이야기 2020.10.04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샅샅이 모조리 뒤져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자 [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 김탁환 / 해냄 ] 예초기 하나로 가장 자신 없는 일은 농사. 뭐 해 본 적이 없으니 서툴 수밖에 없다. 아래 매실 밭주인에게도 그렇게 보였을 터, “그것으로 깎이겄소?”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묻는다. 얼마 전 전기 충전식 예초기를 두고 했던 말과 똑같다. 광고와는 달리 그 전기충전 예초기는 이웃집 남자가 보는 앞에서 힘은커녕 장난감마냥 멈춰서는 수모까지. 이번에는 절치부심, 학교 주무관님께 사전 연수까지 철저히 받고, 형님이 준 2행정 나일론 커터를 호기롭게 돌렸다. 오늘따라 파워가 장난이 아니어서 시원하게 깎이는 그 녀석을 들고 애초 시간보다 갑절은 더 일하고도 으쓱. 앞으로는 아랫집 주인의 잔소리가 줄어들 것 같은 예감. ..

책이야기 2020.10.04

시가 내게로 왔다

삶이 어찌 이다지 휘몰아치며 [시가 내게로 왔다 / 김용택 / 마음산책] 임방울 / 송찬호 ~삶이 어찌 이다지도 휘몰아치며 도도히 흘러갈 수 있단 말인가 커다란 산맥에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이기며 오라, 삶이여! 부서지며 굽이치는 저문 강을 건너 새벽같이 오라. 언젠가, 그 언젠가 한번은 꽃피고 싶은 내 인생이여! -김용택 꽃씨를 거두며 / 도종환 언제나 먼저 지는 몇 개의 꽃들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이슬과 바람에도 서슴없이 앞을 던지는, 뒤를 따라 지는 꽃들은 그들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꽃씨를 거두며 사랑한다는 일은 책임지는 일임을 생각합니다. 사랑한다는 일은 기쁨과 고통, 아름다움과 시듦, 화해로움과 쓸쓸함 그리고 삶과 죽음까지를 책임지는 일이어야 함을 압니다. 시드는 꽃밭 그늘에서 아이들..

책이야기 2020.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