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클라라와 태양

짱구쌤 2021. 5. 9. 14:31

해가 저한테 아주 친절했어요

[ 클라라와 태양 / 가즈오 이시구로 / 민음사 ]


남아있는 나날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죠.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는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남아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해가 저물 때부터를 가장 좋은 때라고 말하는 소설 남아있는 나날]은 명문가의 집사로 평생 살아오다 은퇴한 스티븐슨을 주인공으로 세운 이야기이다. 노벨상 작가의 작품치고는 소박하다라며 읽었었는데 잔잔하면서도 울림이 작지 않아, 뭐든 스케일로 평가하려는 오래된 습성을 반성하기도 하였다.
관계와 열정으로 채워진 뜨거웠던 해의 시간을 지나 자신에게 충실해야 하는 남아있는 저녁 시간이 점차 중요해지는 나이로 접어든 나 같은 이들에게는 참 좋은 소설이었다. 그러던 작가가 해의 시간을 이야기한다. 익숙하지 않은 미래의 시간에도 여전할 것이라는 해에 대해 말이다.

 

에이에프(Artificial Friend) 클라라

인공친구 정도로 번역되는 에이에프는 어린이들의 친구 로봇이다. 어떤 수술로 인해 몸이 많이 약해진 조시가 택한 에이에프는 클라라다. 같은 로봇이어도 학습과 경험에 따라 다른 능력과 특성을 갖게 되는 에이에프 중 인간의 감성에 가장 가까운 로봇 같지 않은 로봇이다. 유독 태양을 좋아하고 진열대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주로 사람들)에 관심이 많은 클라라는 운명적인 친구 조시를 만나 그의 집으로 간다. 영원한 친구를 원했던 조시, 병약한 딸 조시를 대신할 복제품 로봇을 원했던 엄마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결정이었다.
이야기는 열두 살 소녀 조시가 건강을 되찾아 대학생으로 독립해 집을 떠날 때까지 이어지다 끝이 난다. 반려동물(식물까지) 전성기가 지나면 도래할 것으로 내가 예측하는 에이에프시대에는 인간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수(시)술도 일반화 될 것이다. 물론 이를 거부하고 인간 본연으로 살아가려는 부류도(소설에서는 낙오자로 묘사) 있을텐데 작가는 특유의 감성과 상상력으로 이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열일 하는 태양

죽이 아주 잘 맞는 조시와 그녀의 에이에프 클라라는 해질녘을 가장 사랑한다. 소파에 반대로 올라 사위어가는 저녁놀을 바라보는 시간은 둘만의 깊은 교감이 오가는 때이다. 딸을 영원히 곁에 두고 싶어나는 엄마의 욕망은 초상화 그리기(복제) 큰 사건으로 이어지지만 인위적인 조율에 반대하는 아버지와 이웃들에 깊이 공감한 클라라는 절친 조시에게 필요한 것은 태양이라 깊게 믿는다. 태양빛을 가리는 공해 유발 머신을 정지시키고, 태양이 쉬어가는 헛간에 들러 진심어린 기도를 드린다. 오랜 흐림 끝에 등장한 태양빛을 활짝 젖힌 창문으로 들여 조시를 다시 일어나게 하는 기적(?)도 일으킨다. 모든 인간을 등급화하고, 인위적으로 능력치를 끌어올리는 것이 보편화된 시대에도 태양은 여전히 유효하며 위력적이다.
군대 다녀온 아이의 자취방을 얻어주었다. 잠만 자는 원룸은 공간의 비인간성도 그렇지만 햇볕과 바람의 드나듦이 너무 인색하다. 하여 툭 터진 사방으로 햇볕과 바람이 자유로운 공간을 찾아 옥상으로 올라갔다. 옆집 정원을 앞마당으로 두고 새소리에 아침을 시작하는 보기 드문 도심 풍경도 가능한 곳은 만족스러웠다. 4층까지 오르내리는 것이 헬스장을 방불케 하고, 건넛집 옥상에 설치된 이동통신 안테나가 꺼림직 하지만 그곳에서 아들의 몇 년이 더욱 풍요롭길 바란다.

 

심연을 발굴해 온 작가

미래는 과학자들의 열정과 의지로 준비되지만 작가들의 상상력도 결코 빠질 수 없다. “소설의 위대한 정서적 힘을 통해 인간과 세계를 연결하고, 그 환상적 감각 아래 묻힌 심연을 발굴해 온 작가” 라는 평으로 2017년 노벨문학상을 저자, 가즈오 이시구로는 영국에 거주하는 일본사람이다. 워낙 어린 시절부터 유럽생활을 해와서인지 고향 특유의 정서가 자주 드러나진 않지만 섬세한 심리 묘사는 일본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책을 읽는 내내 사람들의 대화가 편하지 않았다. 동문서답에 심기를 직접 건드리는 시비조의 말투(클라라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들의 공통점)는 어쩌면 미래에 우리가 맞닥뜨려야할 가장 큰 도전이 아닌가 싶었다. 사람들끼리 깊이 교감하지 못하는 관계를 로봇에서 보완하려는. 로봇이지만 절친 인간을 위해 헌신하려는 클라라를 통해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가장 슬픈 장면은, 야적장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아직 살아서 지난날을 회상하는 클라라를 보는 것이다. 옛 매니저와 만난 클라가 말한다. “태양은 저에게 아주 친절했어요.” 반려동물과의 이별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토사구팽식의 예의 없는 이별은 불편하고, 과도한 형식적 이별도 낯설다.
수많은 문제가 걱정되는 미래이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태양을 사랑하고 인간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태양을 쐬러 시골로 나가 볼 것이다.

2021년 5월 9일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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