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짱구쌤 2020. 10. 4. 11:49

샅샅이 모조리 뒤져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자
[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 김탁환 / 해냄 ]

예초기 하나로
가장 자신 없는 일은 농사. 뭐 해 본 적이 없으니 서툴 수밖에 없다. 아래 매실 밭주인에게도 그렇게 보였을 터, “그것으로 깎이겄소?”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묻는다. 얼마 전 전기 충전식 예초기를 두고 했던 말과 똑같다. 광고와는 달리 그 전기충전 예초기는 이웃집 남자가 보는 앞에서 힘은커녕 장난감마냥 멈춰서는 수모까지. 이번에는 절치부심, 학교 주무관님께 사전 연수까지 철저히 받고, 형님이 준 2행정 나일론 커터를 호기롭게 돌렸다. 오늘따라 파워가 장난이 아니어서 시원하게 깎이는 그 녀석을 들고 애초 시간보다 갑절은 더 일하고도 으쓱. 앞으로는 아랫집 주인의 잔소리가 줄어들 것 같은 예감. 마을 사람들의 걱정거리 가득했던 ‘게으른 순천양반’이 얼치기 농꾼으로 인정받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 예초기 하나로.

 

美實蘭미실란과 碩果不食석과불식
‘아름다운 사람들이 희망의 열매를 꽃피우는 곳’ 한 10여년 전부터 정기 구독하는 [전라도닷컴]에서 얼핏 본 ‘미실란’. 광주 친구들이 가끔 다녀온다는 소문만 들은 그곳 주인장 이동현은 둘째 아들 이름과 같다. 발아현미를 재배·판매하고 자연밥상 [飯(반)하다]를 운영하는 그곳을 소설가 김탁환이 드나들며 주인장과 나눈 이야기가 주된 글이다. 곡성의 시골 폐교를 구입해서 오늘날의 농업회사로 키운 사람은 米實이 아니라 美實이라 이름 짓고 산다. 아름다움과 열매가 만났으니 그곳에서는 사람 향기 폴폴나는 일들이 일어날 거라 기대가 된다. 碩果不食. 위기와 절망 속에서도 씨과일을 먹지 않고 남기는 것은 희망에 대한 말이다.

 

정은경과 이동현
코로나19 사태에서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이제는 청장)의 리더십은 단연 돋보였다. 흔들림 없이 사실을 말하고(작가 김훈은 ‘성과를 자랑하지 않았고 실패를 숨기지 않았고’로 표현했다) 줄기차게 당부했다. 사람들은 두려웠지만 묵직한 그의 말을 신뢰하며 서서히 위기에서 빠져나올 힘을 얻었다. 불확실한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리더십을 본 것이다. 정은경의 질병관리본부는 근거 없는 낙관주의를 경계하면서도 분명한 방역의 방향성을 제시하였고, 가능한 수단을 총 동원해 찾아내고 검사하면서 오류와 허점을 하나씩 줄여나가는 치밀함을 보여주었다.
[미실란]의 이동현 대표는 발아현미에 가장 적합한 볍씨를 찾기 위해 그의 논 천 평에 278종의 볍씨를 한 줄씩(나중에는 8천명에 4줄씩) 손으로 심는 전수조사를 감행하였다. 일일이 볍씨 이름표를 붙이고 때때로 들어가 손으로 피를 뽑는 수고를 십수년 째 계속해오고 있다.
쓸데없이 시간과 힘을 낭비한다는 비판이 날아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모른다. 샅샅이 모조리 뒤져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자의 힘겨움과 즐거움을. (161쪽)

 

곡성과 구례
농부과학자 이동현이 둥지를 튼 미실란은 곡성에 있다. 그곳 [飯하다]에 밥 먹으로 온 김탁환이 우연히 이대표를 만나 서로에게 반한 이야기가 부럽다. 곡성은 내 직장이 있는 구례와 함께 가장 작은 지자체에 속한다. 지역 소멸을 이야기할 때 늘 앞자리에 오르는 이름들이다. 이번 추석 지역 정가의 가장 큰 관심사는 광주·전남 통합이었다. 과밀화, 집중화 되어가는 수도권에 맞선 지방의 힘겨운 노력이야 탓할 바 아니지만 번지수를 잘못 찾은 ‘쉬운 길’은 분명한 듯 하다. 위기의 두 지역이 상생(?)하기 위한 가장 쉬운 길이 통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광주전남의 통합 이후에는 전북과의 통합도 쉬운 길이 될 것이다. 각자가 가진 특성을 살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이 필요한 때, 쉬운 길은 매우 큰 유혹이지만 세상에는 그렇게 쉬운 일이란 없다.
미실란의 이동현은 함께 잘사는 농촌기업의 모델을 통해 곡성을 지켜야 하고, 작은 학교 용방의 이장규는 ‘365일 놀이배움터’에서 구례를 아름답게 지켜야 한다.

 

아름답지요?
폐교를 리모델링한 미실란에서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것이 마룻바닥이었다고 한다.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마룻바닥에서 뿅뿅다리, 섬진강과 태안사에 이르기까지 이동현 대표가 김탁환 작가에게 가장 많이 쓰는 말 ‘아름답지요?’
농부 이동현이 논 사람(벼), 우렁이, 물뱀, 참새와 대화하는 장면은(실제 상황이란다) 작가 김탁환 특유의 품격이 더해져 절창이다.(중략)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아름다움, 압도적이어서 말을 잃게 만드는 아름다움이 거기 있었던 것 같다. 읽는 내내 그 질문 겸 감탄사를 들었고 또 따라했다. 아름답지요? -정혜신·이명수 추천사 중
서툰 예초기질로 나름 초보 농부로 인정받았다고 뿌듯해하며 잡초 제거작업을 마쳤다. 첨산으로 넘어가는 석양빛이 아름다워 단 번에 찜했던 시골 집터에서 다시 한 번 그 선택을 흐뭇해하며 지는 해를 본다. ‘아름답지요?’
2020년 10월 4일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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