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341

짱구쌤과 팽나무

짱구쌤과 팽나무 - 「봉숭아와 조몬삼나무」 따라하기 [나는 숲으로 물러난다 / 야마오 산세이 / 상추쌈] 짱구쌤 저는 이곳에서 한 시간쯤 떨어진 광주가 고향입니다. 20대에 고향을 떠나 직장이 있는 완도, 영암, 신안을 거쳐 지금은 순천에서 주로 지냅니다. 팽나무 저는 용방면에서 태어나 아주 오래 이 자리에서 쭉 살고 있습니다. 다른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합니다. 나무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고향에서만 살아갑니다. 짱구쌤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것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곳들을 많이 구경하며 살았습니다. 팽나무 저는 멀리에서 날아오는 새들, 계절마다 불어오는 바람을 통해 세상 소식을 듣습니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짱구쌤 저는 짱구쌤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

책이야기 2023.02.08

긍게 사램이제

[아버지의 해 방일지 / 정지아 / 창비] 산림조합 장례식장 우선 익숙한 지명이 등장한다. 소설의 무대가 구례인 탓이다. 구례중앙초를 나온 주인공 모녀는 문척 다리를 건너다녔고, 오거리 수퍼에서 담배를 나눠 피웠으며, 아버지의 마지막은 산림조합 장례식장이었다. 그곳에서 3일간 치른 장례가 소설의 주된 이야기이다. 4년을 빨치산으로 살다 위장 자수, 투옥, 재수감을 거쳐 평생 ‘빨갱이’의 천형을 안고 산 아버지가 치매를 앓다 전봇대에 부딪혀 죽는다. 장례식장을 찾은 사람들과 얽힌 이야기는, 얼핏 무거울 거란 우려를 씻고 시종 유쾌하고 감동적이다. 작가의 내공이다. 빨치산의 딸 1988년에 읽은 이태의 [남부군], 1989년의 [태백산맥]은 반쪽짜리 역사를 거부하던 청년학도에겐 새로운 세상이었다. 남북 양쪽..

책이야기 2023.01.30

나무가 되고 싶은 사람들

나무가 되고 싶은 사람들 [어제를 향해 걷다 / 야마오 산세이 / 상추쌈] 7,200살 야쿠시마 조몬삼나무 일본 남부 야쿠섬에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조몬스기가 있다. 최소 수령 2,800년에서 최대 7,200년까지 추정하는 삼나무로 섬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지은이의 표현대로라면 부처의 해탈과 예수의 부활 훨씬 이전부터 이 세상에 나와 지금까지 건재하다. 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의 주무대도 이곳 야쿠섬의 숲과 나무들이다. 도쿄 태생의 지은이는 가족들과 함께 이곳 야쿠섬에 들어와 25년간 생활하며 ‘원고향’, ‘자연생활’의 철학을 실천한다. 생태운동가이자 시인인 지은이에게 7,200살 조몬삼나무는 영감의 원천이다. 과학과 서양으로 대변되는 미래와 진보에 대하여, 조금 부족한..

책이야기 2023.01.26

오르한 파묵

책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며 [오르한 파묵 / 이난아 / 민음사] 작가는 바늘로 우물을 파듯이 남은 생애를 수도승처럼 방 한구석에서 (글을 쓰며) 보낼 수 있다.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첫째도 인내요, 둘째도 인내요, 셋째도 인내. 작가는 바늘로 우물을 파듯이 글을 써야 (31쪽) 32년을 매일같이 평균 열 시간 이상을 꾸준하게 썼다고 한다. 작가 조정래와 황석영은 이를 ‘글감옥’이라 했고, 하루키는 ‘직업으로서 소설가’라 규정했다. 임윤찬도 그랬다. 반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을 차지한 후, “올해 들어 가장 심란한 마음, 산에 들어가 피아노만 치고 살고 싶다.”라고 했다. 19살 청년은 작은 성취에도 자랑하고 싶은 마음만 앞서는 나를 부끄럽게 했다. 작가 김훈이 확인 사살을 한다. “생사의 급박함을..

책이야기 2022.09.20

필경사 바틀비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 필경사 바틀비 / 허먼 멜빌 / 문학동네 ] I would prefer not to. 필경사가 필요하던 시절, 월스트리트에서 잘나가던 변호사 사무실에 구인광고를 본 한 젊은이가 들어온다. ‘창백하리만치 말쑥하고, 가련하리만치 점잖고, 구제불능으로 쓸쓸한 그 모습’으로 필경사 바틀비다. 사무실의 나머지 세 필경사들이 워낙 독특하였기에 그렇게 두드러지게 조용한 풍모를 가진 그가 선택된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서툴지만 자신의 일인 필경 만큼은 깔끔하게 처리하던 그가 삼일 만에 폭탄선언을 한다. 필경한 문서의 검수 작업을 요청(명령?)하자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 간명한 그의 답은 당황스러웠으나 이내 사무실의 모두에게 당연하게 ..

책이야기 2021.06.05

오디오는 미신이 아니다

겉멋은 빼고, 음악을 듣자 [ 오디오는 미신이 아니다 / 한지훈 / STEREO MIND ] #1. 1981년 대인동 전자상가 중학교 1학년 때 친구 집에서 본 과학 잡지를 오려 대인동 전자상가를 뒤졌다. 그렇게 찾은 트랜지스터, 저항, 코일 등을 이용해서 만든 분유통 라디오는 거짓말처럼 켜졌고 이어폰으로 들리는 음악 방송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소리에 대한 부심이 생기는 순간. 한동안 몇 개의 라디오를 더 조립한 후에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늘 라디오를 가까이에 둔 까까머리 중고등학생은 급기야 수업시간 겁 없는 농구중계 청취로 이어져 모교의 준우승 소식을 수업시간에 외치는 참사를 겪기도 하였다. 물론 라디오는 압수당했다. #2. 1993년 소안국교 사택 전축이 그리 흔하지 않은 시절에도 아버지는 ..

책이야기 2021.06.03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

스토리의 힘,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 / 태 켈러 / 돌베개 ] 조아여 한국인 3세 미국작가가 쓴 이야기는 할머니, 고사, 떡, 쑥과 같은 우리에게 익숙한 정서가 가득하다. Black lives matter를 유행시켰던 플로이드 사건의 불똥이 아시아인혐오로 잘못 튀고 있는 시점에 소수민족(?)의 정서를 노래한 작품이 뉴베리상을 받아 좀 어리둥절하다. 미국의 다양성과 이중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조아여(조용한 아시아 여자애)로 살기 싫은 릴리를 주인공으로 한국인 할머니 ‘애자’에게 들은 호랑이 이야기가 중심을 잡는다. 도망치듯 한국을 떠난 엄마를 따라 도착한 미국은 할머니에게 얼마나 낯설었을까? 못하는 영어를 대신해 준 것은 부지런함, 호의, 숨긴 쾌활함 같은..

책이야기 2021.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