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341

밑줄이 없어도 아무렇지 않은

밑줄이 없어도 아무렇지 않은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 마쓰이에 마사시 / 비채] 일본 현대문학의 정통성 고도 경제성장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안이한 자기 과시욕에 구애되지 않고, 실질적이면서도 시대에 좌우되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닌, 그러면서도 사용하기 편리한 건물을 무라이 슌스케는 하나하나 만들어내고 있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작가의 전작에 나오는 위의 문구처럼 그 무엇에 구애받거나 좌우되지 않은 작품이었다. 작가가 일본에서 가장 사랑하는 땅, 홋카이도의 어느 가상 마을을 배경으로 3대 100년의 이야기를 12명의 인물과 4마리의 홋카이도 개를 주인공으로 담담하게 펼쳐 보인다. 일본 현대문학의 정통성으로 부른다는데, 우리 문학의 누구쯤 될까를 생각해 봐도 딱히 맺어지지는 않는다. 김..

책이야기 2023.08.02

내 인생의 음악 편지

내 인생의 음악 편지 [우리가 하려고 했던 그 거창한 일들 / 이종민 엮음 / 걷는사람] 행복한 사람, 이종민 딱 내가 해보고 싶은 일들이었다. 가르치는 일을 무사히 하다 퇴임하기, 음악 매일 듣기, 좋은 사람들과 술 자주 마시기, 애틋한 사람들과 편지 나누기, 시골집에서 마음대로 살기, 읽고 쓰기. 그리고 이렇게 [내 안생의 음악 편지]처럼 여러사람들을 부추겨 정년 퇴임 책 출판까지, 어느 것 하나 부럽지 않은 것이 없다. 전북대 영문과 교수, 전주한옥마을을 키운 문화기획가, 시민사회활동가로 마당발을 과시해온 그가 2년 전, 정년 퇴임을 앞두고 지인 116명에게 [내 인생의 음악 편지] 원고를 받아 출간한 책이다. 각자의 인생 스토리가 깃든 음악을 소개하는 편지는 그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장르를 포괄한다..

책이야기 2023.08.02

전라도 말은 살아있다

[그라시재라 / 조정 / isonomia] 아따 그 말이 그럴 듯 하시 오늘은 미암떡이 선생이시 시인은 영암 출신이다. 어릴 적 동내 할머니들 틈에서 들은 이야기를 사투리 그대로 기억해서 쓴 서남 전라도 서사시다. 30여년 전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은 그 작품성과 함께 찰진 전라도 보성사투리로 우리 문학을 한 단계 올려놓더니만, 이제 온전히 사투리만으로 웃음과 감동을 선사한 조정 작가는 진짜배기 ‘라도’사람이라 부를만 하다. 개인적으로는 처가인 영암에서 13년을 살았고 지금도 장모님이 그곳에 계시니 시집에 나오는 거의 모든 말들은 무척 살갛고 이무럽다. 동네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한 미암떡이 오늘은 용케도 모두가 잘 모르는 말을 그럴듯하게 해석하자, 동네 성님들의 칭찬이 쏟아진다. “오늘은 미암떡이 선생이..

책이야기 2023.07.11

삶의 격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내가 결정한 삶” [삶의 격 / 페터 비에리 / 비채] 철학자는 작가에게, 작가는 철학자에게 배운다 본명은 페터 비에리, 필명은 파스칼 메르시어인 저자가 지난달 세상을 떠났다. 존엄성과 언어에 대해 깊이 천착한 철학자는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더니, 자본에 잠식당한 대학 강단을 스스로 나와 작가로 더 많은 필명을 떨친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통해 그를 알았고, 최근작 [언어의 무게]로 건재함이 반가웠었는데 이제 막 철학자를 알아가는 차에 비보를 들었다. 모든 작가는 철학자의 다른 얼굴이라고 믿게 되는 그의 소설들은 한 장 한 장 아껴 읽게 되는 힘을 가졌다. 소설책 한 권의 여운이 서양 교회의 종소리만큼 짧고 가벼웠다면, 그의 그것은 우리 산사의 동종만큼 길고 깊게 남는다. 헤..

책이야기 2023.07.08

우리의 시간을 멈추는 것은 아름다운 문장뿐이었다

[언어의 무게 / 파스칼 메르시어 / 비채] 하얀 카스트 글리오블라스토마 멀티폼, 종양을 뜻하는 의학용어다. 주인공인 사이먼 레이랜드는 종양 진단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으나 11주 후에 오진으로 판명나고 다시 열린 삶으로 돌아와 그간의 인연들을 만나 시간을 돌아본다. 그 오진을 내렸던 의사가 내뱉은 종양의 의학적 용어를 ‘하얀 카스트’들의 언어라 일갈한다. 그리스, 로마어에 하버드발 전문 용어의 남발은 견고한 그들만의 리그를 만드는데 기여하고 문제의식조차 느끼지 못하는 집단 최면 상태에 빠지게 한다. 하얀 가운에 이어 법복으로 상징되는 검은 카스트들의 행태도 그리 다르지 않고, 우리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검사 정권’으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친밀함은 나눌 수 없습니다 오랜 연인의 남자친구를 ..

책이야기 2023.06.11

인생의 역사

○는 나를 사랑한다. ○가 나를 사랑한다. [인생의 역사 / 신형철 / 난다] 브레히트와 노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에게 말했다/“당신이 필요해요”/그래서/나는 정신을 차리고/길을 걷는다/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브레히트) 80년대 말 금남로 원각사 옆에 카페 [브레히트와 노신]이 있었다. 생뚱맞다는 표현이 딱인 그곳의 주인은 내 형의 괴짜 선배였는데 덕분에 몇 번 놀러 가서 고급스런 인테리어와 한 번도 본 적 없던 음식을 맛보기도 했다. 전사 김남주가 번역한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덕분에 브레히트는 당시 우리들 사이에서 꽤나 알려져 있었고, 노신(루쉰) 역시 중국 혁명의 열풍 속에 운동권 탐독서에 그 이름이 올라있던 차이지만 도무지 ..

책이야기 2023.05.31

마쿠라노소시

천년 전 일본 여방(女房)의 감성이라니 [마쿠라노소시 / 세이쇼나곤 / 지식을만드는지식] 261. 환희-기쁜 것 아직 읽은 적이 없는 모노가타리(物語) 제1권을 읽고 다음 권이 읽고 싶던 차에 그 나머지 권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 칭찬을 받거나 고귀하신 분께 인정받았을 때. 밉살스러운 사람이 안 좋은 일을 당했을 때도, 천벌 받을지 모르지만 기쁜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다. (159쪽) 헤이안 시대 여방(우리의 상궁 정도) 세이쇼나곤이라는 여인이 천 년 전에 쓴 수필집이다. 단편 장단 302단으로 이루어진 는 베게란 뜻의 마쿠라에, 묶음 책이라는 소시가 합쳐진 말로 베겟머리 책 정도로 해석된다. 여성들의 사적인 감상록임에도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사랑을 받는 수필집..

책이야기 2023.05.25

책벌레와 메모광

책과 기록에 대한 한없는 사랑 [책벌레와 메모광 / 정민 / 문학동네] 책벌레들의 향연 오늘도 나는 풀칠을 한다. 한 장 한 장 펼쳐 풀칠하면 다음 면으로 넘어가는 동안 책 한 권의 윤곽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 좋다. 촬영이나 복사를 하면서 한 번 넘겨보고, 접지할 때 한 번 더 보고, 풀칠하면서 한 번 더 보면 책의 골격이 어느 정도 파악된다. 풀칠을 마치고 무거운 책으로 두어 시간 눌러두었다가 뽀송뽀송해진 뒤에 짱짱해진 책장을 쫙 펼치면 마른 풀 기운이 당겨지면서 기지개 켜는 소리가 난다. 이때의 기분은 더없이 개운하다. 한 손에는 붉은 먹을 찍은 붓이 메모할 지점을 놓치지 않으려고 붓방아를 찧고 있다. 244~245쪽 저자의 취미는 책을 만드는 일이다. 책과 함께 일상을 함께 하는 사람이 쉼도 책..

책이야기 2023.04.03

정세현의 통찰

우크라이나는 왜 두들겨 맞는가? [ 정세현의 통찰 / 정세현 / 푸른숲 ] 정세현이 이 책을 쓴 이유 한국이 자주성을 가지려면 가장 먼저 한국 사회의 상층부를 형성하고 있는 지배계급이나 기득권층 또는 중산층 사람들이 자신들의 머릿속에 대미 종속성이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사실 나는 우리 국민들이 그것을 깨우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 책을 쓰자는 데 동의했다.(213쪽) 사실 난 북한대학원에 가고 싶었지만 그곳이 경남과 서울에 있어서 못해 아쉬웠다. 정세현 전 장관은 남북관계와 국제정세에 있어서 내가 가장 신뢰하는 전문가이자 정책가이다. 정욱식, 이종석, 김연철, 정동영도 훌륭하지만 56년을 오직 한길만 걸어온 저자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작고한 DJ를 제외하곤) 생각한다. 그가 작금의 혼란스..

책이야기 2023.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