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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의 최선으로 20년을 달려온 제자들아!

2024년 1월 1일 10시에 만납시다 20년 전 영암초 6학년 2반 교실. 졸업식을 마친 아이들은 마지막으로 교실에 들러 담임인 짱구쌤의 훈화를 듣는다. “두 가지를 약속합시다. 첫째는 20년 후 1월 1일 1시에 이곳 영암초 운동장에서 만나는 겁니다. 둘째는 그때까지 살아있어야 합니다. 살아있으면 좋은 날 올테지요.” 진짜로 만날 줄은 몰랐다. 이틀 전, 은지가 블로그에 댓글을 달 때까지는 말이다. “그날 만나는 거지요?” 열여덟 명이 모일 줄이야. 20년 전 우리 6학년 2반 35명은 유난히 활발했고 다른 반이 부러워할 만큼 우애도 깊었다. 그리고 20년이 쏜살같이 흘렀다. 저마다 최선으로 달려온 20년 1시 정각에 맞춰 영암초 후문 주자장에 도착했을 때 먼 발치에 모여있던 한 무리들이 환호성을 질..

어깨동무 2024.01.01

1월 1일이 기다려지는 이유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서른 두세살에 인생이 얼마나 바쁜지 알았다면 20년 후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20년 만에 댓글이 달렸고 그 신호를 붙잡고 내일 약속 장소에 가보려고 한다. 다행스럽게 설렘과 흥분이 아직 남아있으며 녀석들에게 밥 한끼 사줄 사정은 가능하기에.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20년 전 문집을 찬찬히 넘겨보고 있다. 영암초 6학년 2반 교실이 눈앞에 펼쳐진다.

어깨동무 2023.12.31

더 나은 선생이 되어야 한다

유독 착한 아이들이 모인 곳, 용방 지난해 스승의 날을 앞두고 교장실을 찾아온 지*이가 건네준 상장이다. 다소 엄숙한 표정으로 상문을 읽고 정중하게 상장을 전달한 후 쿨하게 가버린다. 매일 아침 두 형제가 아빠 차에서 내려 쌍둥이처럼 장난치며 뛰어가는 모습은 언제나 정겨웠는데 올봄 갑작스러운 전학 소식에 많이 서운했다. 가장 잘 보이는 교장실 벽면에 걸어놓고 매일 이 상장을 읽으며 다짐한다. ‘그래, 난 친절한 교장이야.’ 외부에서 우리 학교를 찾은 강사분들은 하나같이 우리 아이들의 순수함과 열의를 칭찬한다. 여느 초등학생들과는 달리 잘 집중하고, 감탄한다는 것이다. 모지리 교장이라 흉볼까봐 우리 아이들 자랑은 최대한 자제하고 있지만, 보기 드물게 착한 아이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용방 최고의 자랑은 열정..

나의 이야기 2023.12.28

대처에 나다니지 않고

먼저 영예의 전남교육상을 받게 되어 영광입니다. 수많은 훌륭한 선후배 교원들이 계실진데, 미력한 제가 이 상을 받아도 되는 건지 걱정도 앞섭니다. 30년 넘게 농어촌의 작은 학교와 교실을 지키며 전라도 아이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시간에 대한 위로와 보상이라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안합니다. 저를 짱구쌤이라 부르며 함께 그 시간을 건넜던 456명의 아이들과, 8개 학교에서 부족한 저를 성장시켜 주셨던 동료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특히 세상에 없던 학교를 꿈꾸며 지난 4년간 함께 분투한 용방교육가족들께 감사드립니다. 하나같이 No.1을 추구하는 가망없는 질주의 시대에, 모두가 저마다의 빛깔로 아름다운 only 1이 되는 전남의 학교를 꿈꿉니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1992년 첫발령지 소안국민학교의 작은 ..

나의 이야기 2023.12.11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우주를 만들어 간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

무해한 사람들, 선한 사람들 언제 회신될지 모를 신호를 우주에 흘려보내며 온 우주에는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과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 자연 그리고 우주를 동경한다. (작가의 말 중) 정말 혜성같이 등장했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저자 심채경은 행성과학자다. 목성, 토성, 수성, 타이탄을 거쳐 지금은 달을 연구하고 있다. 현대의 천문학자는 하늘보다는 모니터를 보는 시간이 훨씬 많다는 사실과 함께, 그가 정말 만만치 않은 내공을 가진 과학 저자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주를 연구하고 사랑하는 ‘무해한 사람들’이란 말 속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는데, 나와의 공통점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분야라 더 신기했다. 언젠가는 터트릴 거라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아이들의 오늘을 사랑하고..

책이야기 2023.10.25

잘 알지도 못하면서 훈수만 하잖아요?

“짱구쌤, **이 누나가 막 욕해요.” 2학년 꼬마가 불쑥 교장실에 들어와 하소연이다. 도서관으로 달려가니 노란 매트를 차지한 **이가 아무렇지 않은 듯 책을 보고 있다. “**아! 동생들한테 욕하면 쓰나? 좋게 말해라.” “네” 교장실로 돌아와 앉기도 전에 그 2학년 꼬마가 다시 달려온다. 또 누나가 욕한다는 말에 이번엔 큰소리가 나간다. “교장실로 와! 교장실에 온 **이가 묻는다. “얼마나 있어야 해요?” “10분” 교장실에서 잠시 앉아 있던 **이는 결재를 위해 모니터를 보고 있는 사이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 도서관에 가보니 천연덕스럽게 그 너란 매트에 앉아 책을 보고 있다. “**아, 교장실로 다시 와!” “왜요? 아무 말도 안하면서” “교장실에 가서 말하자.” “여기서 하세요. 잘 알지..

나의 이야기 2023.10.19

버티는 것과 견디며 나아가는 것

노벨문학상 2023년 노벨문학상은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가 받았다. 매번 수상 후보에 올랐다는데 나에겐 ‘듣보작’이다.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노벨상을 주는 건지 따지고 싶은 마음과 적어도 노벨문학상 작품 정도는 읽어야지 하는 부러움에 곧바로 책을 구입했다. 작가 정여울의 추천사처럼 ‘심각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도, 위대한 인간이 등장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름답고 눈부신 이야기’를 특별한 언어로 이야기한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침묵과 리듬의 글쓰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얼핏 이해가 될 듯도 싶다. 등장인물들의 짧은 대화에는 늘 침묵이 놓여진다. 독자는 그 사이에서 숨죽여 다음 대화를 기다린다.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글의 힘이다. 노르웨이 어느 섬에 사는 평범한 어부 요한네스가 생의 마지막 날 아침부터..

책이야기 2023.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