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마쿠라노소시

짱구쌤 2023. 5. 25. 18:19

천년 전 일본 여방(女房)의 감성이라니

[마쿠라노소시 / 세이쇼나곤 / 지식을만드는지식]

 

261. 환희-기쁜 것

아직 읽은 적이 없는 모노가타리(物語) 1권을 읽고 다음 권이 읽고 싶던 차에 그 나머지 권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 칭찬을 받거나 고귀하신 분께 인정받았을 때.

밉살스러운 사람이 안 좋은 일을 당했을 때도, 천벌 받을지 모르지만 기쁜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다. (159)

헤이안 시대 여방(우리의 상궁 정도) 세이쇼나곤이라는 여인이 천 년 전에 쓴 수필집이다. 단편 장단 302단으로 이루어진 <마쿠라노소시枕草子>는 베게란 뜻의 마쿠라에, 묶음 책이라는 소시가 합쳐진 말로 베겟머리 책 정도로 해석된다. 여성들의 사적인 감상록임에도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사랑을 받는 수필집이다. 서양이 16세기 <몽테뉴>를 본격적인 수필로 보고 있다 하니 일본의 수필 역사는 우리의 인식을 뛰어넘는다. 하기야 이미 일본은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세(?) 명이나 배출한 문학 강국이다.

자연과 인간의 모습을 잔잔하게 그려내면서 따뜻한 감성을 풍부하게 보여주는 글이 수두룩하다. 거기에 위의 글에서처럼 솔직함과 발칙함까지. 일본 수필 문학의 효시라 불릴만하다.

 

21. 전문직 여성

앞날에 아무런 희망도 없이 오로지 남편만을 바라보며 가정을 지키는 것을 행복으로 꿈꾸는 사람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웬만한 신분의 딸이라면 역시 여방으로 입궐해 이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봐야 하고, 만약 될 수만 있다면 전시 자리까지 오르도록 해야 한다. (25)

진보적이다. 자유연애의 글들은 더욱 그렇다. 신분 차별의 한계 등은 명확하지만 자유로운 영혼이며 매력적인 인간이다. 저자의 말처럼 세상에 나와 견문을 넓히고 관계를 확장한 결과일 것이다. “역사는 더디지만 진보한다.” 노무현 대통령 14주기 슬로건이다. 요즘 정국에 대한 질타이자 자기 확신을 반영한 것이겠으나, 모르겠다. 역사를 가벼이 여기고 진영 논리로 세상을 가르려는 정권 담당자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진보를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의 지리멸렬도 거기서 거기다. 자기 일터에서 이뤄내는 구체적 진보를 신뢰한다.

 

218. 달빛 아래

달 밝은 밤에 강을 건너면 소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치 수정이 부서지듯 물방울이 튀는데, 그 광경은 정말이지 근사하다. (149)

요 며칠 밤하늘은 장관이었다. 조각달과 샛별(금성)이 점점 가까워지는 우주쇼가 펼쳐지고 있었다. 기분 좋은 술 한잔 걸치고 들어선 운동장에서 우연히 올려다본 장관에 한참을 서 있었다. 뉴스와 다른 사람 엿보기가 최대의 관심사가 되어버린 요즘에 하늘의 별이나 달을 볼 틈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시간과 자연의 변화에 둔감해질수록 조급해지고 삭막해진다. 내가.

 

5월에 시골 교정은 참 좋다. 저절로 둥근 공이 되어가는 아름드리 느티나무의 흔들거림은 최고의 잎멍이다. 나는 듯이 달려가 그네와 해먹을 차지하고 뭐가 그리 좋은지 까르륵거리는 녀석들의 소란도 작은 다툼도 사랑스럽다. 결재 놀이에 지칠 때 쯤 슬쩍 나와 걷는 명상숲이나 팽수집의 시원한 바람은, 교실 전투 장수들에겐 한없는 미안함이다. 그중의 백미는 모두가 사라진 빈 교정 다락정자에 누워서 듣는 세상의 모든 음악. 5월이 지나간다. 아까운 바람과 신록이 말이다.

2023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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