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우리의 시간을 멈추는 것은 아름다운 문장뿐이었다

짱구쌤 2023. 6. 11. 20:28

[언어의 무게 / 파스칼 메르시어 / 비채]

 

하얀 카스트

글리오블라스토마 멀티폼, 종양을 뜻하는 의학용어다. 주인공인 사이먼 레이랜드는 종양 진단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으나 11주 후에 오진으로 판명나고 다시 열린 삶으로 돌아와 그간의 인연들을 만나 시간을 돌아본다. 그 오진을 내렸던 의사가 내뱉은 종양의 의학적 용어를 하얀 카스트들의 언어라 일갈한다. 그리스, 로마어에 하버드발 전문 용어의 남발은 견고한 그들만의 리그를 만드는데 기여하고 문제의식조차 느끼지 못하는 집단 최면 상태에 빠지게 한다. 하얀 가운에 이어 법복으로 상징되는 검은 카스트들의 행태도 그리 다르지 않고, 우리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검사 정권으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친밀함은 나눌 수 없습니다

오랜 연인의 남자친구를 죽인(과실치사) 번역가는 10년 형을 선고받고 최후 진술에서 이같이 말한다. 참았던 분노가 터진 것은 나 왔어!”라며 현관에 들어서는 그 남자의 말 때문이었다고. 자신이 연인에게 늘 하던 말을 그에게 들었을 때, “친밀함은 나눌 수 없습니다.” 책에서는 언어로 살아가는 사람들(작가, 출판인, 번역가, 북디자이너 등)이 많이 등장하지만 법관이나, 의사, 식당 주인도 공평하게 다뤄진다. 번역가의 삶을 살았던 주인공 레이랜드를 통해 언어가 어디까지 다다를 수 있는지를 치열하게 다룬다. 전작인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보여준 문제의식의 확장이다. 지중해 지도를 보며 그곳에 깃든 사람들의 언어를 다 배우고 싶다던 주인공은 번역가로 그 뜻을 이뤘지만 그의 삼촌의 바램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이먼, 너는 늘 강하고 경탄스러운 아이였고, 아무도 모르게 학교와 부모님 집을 떠나서 대도시의 불빛과 그 아래 다니는 기차로 도망친 소년이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진기하며 위험한 의지인가! 도박꾼의 의지다! 두려움에 떨 때도 많겠지만 얼마나 큰 자신감이 필요한 일인가! 네가 이렇듯 뜨겁고 정신 나간 의지, 그리고 그 의지의 바탕이 되는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을 다시 한번 불태워서 너 자신의 단어로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펜을 잡길 바란다.(46)

 

우리의 시간을 멈추는 것은

여러 언어를 공부했던 작가의 분신처럼 보이는 주인공 레이랜드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시간과 언어를 이야기한다. 사고로 갑자기 떠난 아내 리비아에게 보내는 편지는 이 작품에 특별함을 부여한다. 편지는 내밀하면서도 성찰적이고 무엇보다 인간적이다. 지나간 시간의 기억은 정밀하지 못하고 파편적이어서 특정한 언어, 장소, 사건으로 나타나지만 그 또한 자기 의지대로 편집되는 것 같다. 처음엔 부정확하게 기억을 떠올리지만 반복할수록 확실하다는 착각에 빠진다. 우리의 시간을 멈추는 것은 아름다운 문장뿐이었다고 했다. 단 한쪽도 쉬이 넘길 수 없는 문장들이 즐비하다. 절망적이다.

우리 삶이 끊어지지 않는 실처럼 부단하게 짜여간다고 느끼며 살잖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인생은 망각에 씻기는, 움직이는 기억의 섬들이 복잡하게 얽힌 긴 고리로 이루어쟈 있어서 우린 이고리에서 저 고리로 이리저리 뛰어다녀. 우리 모두는 스스로도 속일만큼 창의적인 이야기로 그 틈새를 메우지. 마치 우리가 끊임없는 기억의 단단한 근거에 서 있다는 듯이.(488)

 

길 잃지 마!

주인공의 두 자녀들은 도움닫기중이다. 하얀 카스트를 거부하는 큰딸 소피아나, 검은 카스트에 분노하는 아들 시드니가 어렸을 때 엄마 리비아는 항상 길 잃지 마!”라고 했었는데 어느 순간 소피아가 되물었다. “바깥에서요? 안에서요?”그때부터 아이들의 도움닫기가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의사나 법률가가 되어 줄 것을 기대하는 타인의 개입에 맞서, 자기만의 길을 찾아가는 아이들은 그래서 아버지의 든든한 응원군이며 동반자다. 부러웠고 부끄러웠다.

혹시 진짜라는 말이 잘못된 걸까?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걸었던 기대가 더 적당한 말이고, 내가 그들에게 너무 많은 권력을 내어준 걸까? 그래서 나 자신의 삶이 아니라, 그들이 나에게서 기대한 삶을 산 건가? () 타인의 기대는 독재가 될 수 있어. 그 기대는 간교하게도 무의식의 저승에서 행패를 부리지. 그래서 정작 당사자는 알아차리지도, 스스로를 방어하지도 못해. ()타인의 기대는 고요 속에서는 침묵하지. 동물의 소리를 포함한 자연의 소리는 피해를 주지 않아. 고요에서 중요한 것은, 나를 괴롭히고 나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할 수도 있는 타인의 기대가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야.(110)

 

경험의 감옥

반복되는 일상은 공간의 감옥이기도 하지만 경험의 감옥이어서 더 위험하다. 여행을 가는 것도 새로운 공간과 경험을 마주하기 위해서라면, 공간을 바꾸려는 학교의 노력은 매우 근원적이며 적극적인 창조적 실험이다. 함께 사는 이가 요즘 부쩍 경험의 감옥을 호소한다. 아파트에 기대 사는 많은 이들의 하소연과 다르지 않을테지만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집짓기를 미루는 옆지기의 태만함에 대한 항의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 뭔지 알아? 시간이 지나기를 초조하게 또는 불안하게 기다리는 거야. 시간을 그저 내 뒤로보내는 것. 이따금 우리는 삶의 어떤 부분이 이미 지나갔기를 바라기도 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온 힘을 다해 원하지. 이 부분을 제거하거나 건너뛰기를 원해. 완전히 정신나간 바람 아닌가? 하지만 이걸 목표로 하는 감정도 있어. 예를 들면 그리움이야. 우리가 누군가를 또는 어떤 일을 애타게 기다릴 때, 지금과 그것이 나타날 때까지의 사이에 놓인 시간과 나날은 견뎌내야 할 방해물에 불과해. 시간을 계산하고, 엑스 표시를 하며 지워나가지. 말로만 표현할 때보다 훨씬 안 좋아. 시간만 스쳐 보내려는 게 아니라, 이 기간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모든 경험도 삭제하려고 하지. 그게 중요하지 않으리라는 건 처음부터 확실하니까 말이야. 이걸 가장 잘 표현하는 건 목표가 아직 멀리 있는, 증오하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잠이나 알코올로 도피할 때야.

 

발밑에 다시 단단한 땅을 얻기 위해

수없이 빈틈과 여지를 지닌 인간들이 등장한다. 작가는 그들 모두에게 당연한 존엄과 근사한 스토리를 부여하고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어줄 것을 기대한다. 따뜻하다. 내면의 길을 찾아 추락과 등정을 반복하는 모두에게 발밑 단단한 땅을 되찾아주기 위한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 주인공 레이랜드는 새로 얻은 삶의 시간에 자기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좋은 문학 작품은 읽는 이에게 특별한 현재를 선물한다. 더 말 얹을 이유를 찾지 않아도 된다. 올해 최고의 소설을 만났다. 아끼고 아껴 읽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우리 인간은 매끈한 완전체가 아니라 가느다란 틈과 금이 가득한 존재고, 내면의 다양한 고원들에 올라갔다가 추락하며 살아.(426)

난 시정이 열어주는 특별한 현재를 이야기했지. 그리고 당신이 자주 하던 말도 덧붙였어. 뭔가 시적인 것은 우리 삶에 평소와 다른 깊이를 준다고. 그때의 삶은 우리가 전혀 말을 얹지 않아도 그 전체가 중요해진다고.(428)

난 뭔가를 제대로 잘 해낸 적이 없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요? 한동안 계속하면서 깨어있는 거지.(622)

2023611일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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