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책벌레와 메모광

짱구쌤 2023. 4. 3. 15:51

책과 기록에 대한 한없는 사랑

[책벌레와 메모광 / 정민 / 문학동네]

 

책벌레들의 향연

오늘도 나는 풀칠을 한다. 한 장 한 장 펼쳐 풀칠하면 다음 면으로 넘어가는 동안 책 한 권의 윤곽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 좋다. 촬영이나 복사를 하면서 한 번 넘겨보고, 접지할 때 한 번 더 보고, 풀칠하면서 한 번 더 보면 책의 골격이 어느 정도 파악된다. 풀칠을 마치고 무거운 책으로 두어 시간 눌러두었다가 뽀송뽀송해진 뒤에 짱짱해진 책장을 쫙 펼치면 마른 풀 기운이 당겨지면서 기지개 켜는 소리가 난다. 이때의 기분은 더없이 개운하다. 한 손에는 붉은 먹을 찍은 붓이 메모할 지점을 놓치지 않으려고 붓방아를 찧고 있다. 244~245

저자의 취미는 책을 만드는 일이다. 책과 함께 일상을 함께 하는 사람이 쉼도 책이라니. 진정한 책벌레다. 연암, 이덕무, 다산이 오늘날 정민 교수로 다시 태어났다고 믿는다. 저자가 하버드 엔칭연구소로 파견 가서 1년간 그곳 서가에 파묻혀 온종일 옛 책에서 행복했던 기억을 쓴 글이다. 책에 찍힌 장서인(소장 확인), 책장 사이에서 발견한 100년 넘은 나뭇잎, 한여름밤 포획된 모기의 사체, 갈피마다 어지러운 메모와 주서 등 책벌레들의 흔적이 아름답다. 책 속 메모로 찾아간 다른 책, 다른 저자로 넘어가는 여행은 진정한 하이퍼텍스트이자 공부의 달인이다. 부럽고도 부러운 책사랑이다.

 

이덕무의 구서재(九書齋)

이덕무는 자타가 공인하는 책벌레다. 일찍이 책만 보는 바보(간서치看書痴)로 불리우며 한 없는 책사랑의 전형을 보여주었는데, 그가 다산과 더불어 메모광이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한겨울 난방도 안 되던 허름한 서재(실상은 움막)를 스스로 구서재라 불렀다. 책 읽는 방법을 아홉 가지(단계)로 분류하고 철저히 실천한다.

독서讀書-책을 소리 내어 읽음

간서看書-책을 눈으로 읽음

장서藏書-책을 보관

초서鈔書-책을 보며 중요한 부분을 필사

교서校書-책을 교열해 가며 읽음

평서評書-책에서 인상적인 부분이나 전체에 대한 감상이나 평을 남김

저서著書-다른 사람의 책을 읽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써서 책으로 만듦

차서借書-다른 사람에게서 책을 빌려 읽음

포서曝書-책을 햇볕에 쬐어 말려서 습기와 책벌레를 제거함

책이 너무 흔한 시대이다 보니 독서 정도를 유일한 책보기로 사는 우리들에게 옛사람들의 책 읽기는 다채롭고 진지하다. 시대가 달라져서 차서(借書)나 포서()는 거의 사라진 요즘, 도서관 대여나 헌책 구입, 책장 정리 정도가 그 자리를 대신할 듯 싶다. 매주 유치원 아이들에게 두 권 정도의 책은 읽어주니 독서(讀書)는 실천 중이고, 좀 게을러지긴 했으나 간서(看書)는 꾸준하고, 월평균 두세 권의 책은 구입하되 버리질 못하니 장서(藏書)는 넘치고, 유치하고 허접하지만 작은 책 [용방살이] 덕분에 초서(抄書)와 저서(著書)는 했다 치고(?), 예전만큼은 아니어도(이제는 눈 침침 어깨결림으로) 서평으로 평서(評書)하고, 애초부터 교서(校書)는 능력치 밖이니 무시하면 끝.

 

최고의 난적, 프로야구 개막!

어제가 그랬다. 무안으로 앵벌이 다니며 소홀했던 책을 가까이하려 벼렸었는데 프로야구가 시작되었다. 일요일 오후 1패를 안은 기아의 반격에 빠져있을 즈음, 김호령은 날아올랐고 아름답디 아름다운 캐치로 맥주를 불렀다. 가시지 않은 흥분이었다. 올해에도 야구는 책과 다툴 것이다. 야구 경기를 볼 수 없는 조건(관사)에 기대어 위기를 넘겨야 한다. 그깟 야구하고 싸우는 나도 한심하지만 어쩌랴 내 그릇이 그런걸. 난 적어도 책만 보는 바보는 아니다.

202343일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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