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삶의 격

짱구쌤 2023. 7. 8. 16:08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내가 결정한 삶

[삶의 격 / 페터 비에리 / 비채]

 

철학자는 작가에게, 작가는 철학자에게 배운다

본명은 페터 비에리, 필명은 파스칼 메르시어인 저자가 지난달 세상을 떠났다. 존엄성과 언어에 대해 깊이 천착한 철학자는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더니, 자본에 잠식당한 대학 강단을 스스로 나와 작가로 더 많은 필명을 떨친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통해 그를 알았고, 최근작 [언어의 무게]로 건재함이 반가웠었는데 이제 막 철학자를 알아가는 차에 비보를 들었다. 모든 작가는 철학자의 다른 얼굴이라고 믿게 되는 그의 소설들은 한 장 한 장 아껴 읽게 되는 힘을 가졌다. 소설책 한 권의 여운이 서양 교회의 종소리만큼 짧고 가벼웠다면, 그의 그것은 우리 산사의 동종만큼 길고 깊게 남는다.

헤어짐이라는 것은 모든 관계가 곧 자기가 놓쳐버린 삶이요, 어쩌면 그리 살았을지도 모르는, 그러나 살아보지 못한 삶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별을 할 때는 앞서 말한 열린 미래가 특히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상대방에게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p.179

삶에 만족하나요?”“다른 삶을 살아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 수 있죠?”[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이 대화를 잘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균형과 조화

존엄성에 대해 여러 방면으로 정의하며 꼼꼼하게 짚는다. 그중 7장 사물의 경중을 인식하는 존엄성이 가장 와 닿았다. 내가 존경하는 이팝님은 문자건 서한이건 꼭 말미에 이렇게 적는다. ‘조화로운 숨과 여백을 기원하며’. 사실 생각해보면 균형이 깨트려지는 순간, 가령 열정과 격정의 시간 다음에 찾아오는 허무함(숙취 등) 등은 늘상 만나는 위협이다. 자기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침착함뿐만 아니라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즉 전체적인 것에 대한 균형감각도 반드시 필요하다. 십 년 넘게 몇몇 국제구호단체에 작은 후원을 지속하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볼 때가 있었다. ? 국내도 아닌데. 명확한 답변도 못하고 그냥 습관처럼 지내왔는데, 전쟁, 기아, 오지는 내가 맞닥뜨리는 문제를 조금은 사소한 문제로 생각할 내적 거리감을 제공해준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작은 일에 흔들리다 큰 파국을 맡는 일은 너무도 자주 일어나고, 크게 흔들리지 않을 곳에 닻을 내려두어야 한다.

 

사적 은밀함을 존중하는 존엄성

그렇다면 존엄성은 무엇인가?” “사적인 것에 대해서 말을 아낌으로써 타인과의 사이에서 유지되는 간격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간격이 필요한 이유는, 침묵의 경도를 조금 무르게 함으로써 사람 사이의 친밀감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유리처럼 투명하다면 친밀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좁혀야 할 거리라는 것이 애초부터 없기 때문이다.”p.245

간격에 대한 이야기다. 외로움을 떨치고자 찾았던 관계로의 회피가 실상은 최악의 선택인 경우가 있다. 모든 문제는 관계로부터 오는 상처가 많다. 그래서 외로움은 견뎌야하는 것이라고 했을 것이다.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존엄성

그는 여행 상품 책자를 뒤적거린다. 이곳저곳의 풍경, 여기저기의 골목길 모습이 펼쳐진다. 물론 모두 다 구경하고 싶다. 그러나 그곳에 가려면 역, 공항, 호텔 등 반복되는 여정을 건너뛸 수 없다. 정해진 인사말과 잡담을 하기도, 듣기도 해야 된다. 지친 걸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고통을 겪은 자의 기진맥진함은 아니다. “내 영혼이 내 삶에 지쳐버렸다.”라는 문구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까? 분노에 가득 찬 자신을 방어하려는 마음은 결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이런 느낌이다. 충분하다. 이젠 됐어. p.433

이 책을 다 읽고 글이 잘 써지지 않아 묵혀두고 있을 즈음 작가의 부음 소식을 들었다. 책의 마지막 장은 존엄사 등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진지하다. 더 이상 자기 삶의 미래가 궁금하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에게 더 이상 놀랄 일도 없다면?

여든을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그는, 자신의 미래가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을까? 난 그가 노벨상쯤은 받을 줄 알았다. 그래서 아쉽지만 이젠 됐어, 충분하다, 그러했기를..

202378일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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