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필경사 바틀비

짱구쌤 2021. 6. 5. 22:18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 필경사 바틀비 / 허먼 멜빌 / 문학동네 ]


I would prefer not to.

필경사가 필요하던 시절, 월스트리트에서 잘나가던 변호사 사무실에 구인광고를 본 한 젊은이가 들어온다. ‘창백하리만치 말쑥하고, 가련하리만치 점잖고, 구제불능으로 쓸쓸한 그 모습’으로 필경사 바틀비다. 사무실의 나머지 세 필경사들이 워낙 독특하였기에 그렇게 두드러지게 조용한 풍모를 가진 그가 선택된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서툴지만 자신의 일인 필경 만큼은 깔끔하게 처리하던 그가 삼일 만에 폭탄선언을 한다. 필경한 문서의 검수 작업을 요청(명령?)하자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 간명한 그의 답은 당황스러웠으나 이내 사무실의 모두에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이유는?

 

그가 항상 그곳에 있었다는 것,

그는 천천히 공손하게 말하고 살며시 사라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항상 그곳에 있었다는 것, 아침에 제일 먼저 와 있고, 하루 종일 꾸준히 자리를 지키고, 밤에도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내게는 그의 정직함에 대한 남다른 신뢰가 있었다.(71쪽)
본업인 필경을 제외하곤 그 어떤 일도 수행하지 않으려는 그에게 주변의 시선이 고울 리 없다. 세상과 타협하는데 익숙한 고용인은 그를 이해하고 용인하지만 월스트리트의 다른 변호사들의 성화를 견딜 수는 없었다. 피고용인들의 동조가 두려웠을 것이다. 고용인의 위엄을 세울수록 바틀비의 고집은 세어만 진다. 더욱 완고한 I would prefer not to. 업무 거부를 넘어 이동, 숙식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생존 활동을 멈춘다.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 전개, 전무후무한 캐릭터, 반복되는 문구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미국 교과서에도 실렸으며 들뫼즈 등 철학자들의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작가는 모비딕을 쓴 사람이다. 천재들이 그랬듯 생전에는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 모진 평가를 받았을 뿐이다.

 

‘개인’의 등장

틀에 박힌 일을 좋아하는 사람,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사람,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 예술가 등 주인공 바틀비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다양하다. “모두가 YES라고 말할 때 No할 수 있는 사람” 한때 유행이었던 카피의 주인공처럼 소신 있는 사람? 난 ‘개인’의 등장이라고 이해했다.
할 수 없다(I can't do it), 안 할 것이다(I will not do it)가 아니라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를 사람마다 다르게 분석한다. 소외, 계급, 실존, 무정부 등등. 이 책이 널리 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양한 함의와 해석. 보통의 선택이라는 것이 내가 적극 개입할 수 있는 것보다는 주어진 것일 가능성이 크다. 바틀비는 선택의 틀 자체를 거부하며 갈수록 게인(신호의 증폭)을 높혀간다.

 

교실 속 바틀비들

1주일에 4시간 정도의 수업에 들어간다. 한 교실에 2주에 한번 정도 들어가는 꼴인데 요즘 고민은 한 녀석에게 나온다. 나름 준비한 수업이지만 도무지 그녀석의 호기심을 오래 붙들기가 어렵다. 가끔 의도대로 따라오기는 하나 대부분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한다. 처음에는 어르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지만 지금은 조금 여유롭게 놓아두는 편이다. 비단 내 수업에만 그런 것이 아니며, 다른 수업 공개 때 유심히 살펴보니 수업에서 완전히 멀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딴청을 피우면서도 귀와 눈은 계속 열어두며 자기만의 시선과 속도로 참여하는 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교실의 평화인데 교사든, 학생이든 모두에게 해당된다. 어찌 되었든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바틀비처럼, 그 아이도 늘 학교에 오고 수업에 빠지지 않으며 무언가를 계속 하고 있다. 바틀비와 나름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하던 고용인의 태도가 바뀐 것은 월가의 시선, 공동전선 때문이었다.
집단적 시도보다는 개인적 선택이 빈번해지는 시대에 교실 속에 존재하는 바틀비들의 자기선언이 계속 늘어날 것이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2021년 6월 5일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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