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오디오는 미신이 아니다

짱구쌤 2021. 6. 3. 22:17

 

겉멋은 빼고, 음악을 듣자

[ 오디오는 미신이 아니다 / 한지훈 / STEREO MIND ]



#1. 1981년 대인동 전자상가

중학교 1학년 때 친구 집에서 본 과학 잡지를 오려 대인동 전자상가를 뒤졌다. 그렇게 찾은 트랜지스터, 저항, 코일 등을 이용해서 만든 분유통 라디오는 거짓말처럼 켜졌고 이어폰으로 들리는 음악 방송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소리에 대한 부심이 생기는 순간. 한동안 몇 개의 라디오를 더 조립한 후에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늘 라디오를 가까이에 둔 까까머리 중고등학생은 급기야 수업시간 겁 없는 농구중계 청취로 이어져 모교의 준우승 소식을 수업시간에 외치는 참사를 겪기도 하였다. 물론 라디오는 압수당했다.

 

#2. 1993년 소안국교 사택

전축이 그리 흔하지 않은 시절에도 아버지는 늘 거실에 라디오나 테이프 음악을 틀어 놓았고, 형이 대학 입학 축하 선물로 받은 LP오디오가 한동안 우리 집 아침을 깨우는 알람이었다. 음악은 쑥대머리. 대학생 형은 송창식을 비롯한 통기타 음악과 민중가요, 국악에 푹 빠져있었기에 나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대중가요는 거의 듣지 않았다) 여러 음악을 섭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그때의 음악적 취향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1993년 첫 발령을 받은 곳은 광주에서 버스와 배로 6시간 정도 소요되는 완도 소안도였으나, 나는 형에게 물려받은 10년 된 오디오를 보자기에 싸서 기꺼이 내 사택에 가져다 놓고야 말았다. 말이 사택이지 콘크리트 오막살이인 그곳에서 비록 라면과 김치찌개로 끼니를 해결하긴 했으나 언제나 늘 음악은 멈추지 않았다. 섬마을 학교에는 20대 청춘남녀 12명이 모여 있었고 우리는 갖은 핑계를 만들어 같이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마지막은 내 사택에서 음악을 들었다. 지금도 그 좁은 방에서 맥주를 나눠 마시며 들었던 LP판 음악이 생생하다. 사이먼앤가펑클, 송창식, 조동진, 노찾사, 후크드온클래식, 김정호, 양희은, 김소희, 박동진 판소리, 뿌리깊은나무...

 

#3. 2008년 하의초 6년 교실

그렇게 음악은 늘 곁에 있었으나 격이 다른 오디오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것으로 충분했다. 가족들과 함께 섬생활을 시작한 곳은 김대중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하의도, 목포에서 2시간 50분 배를 타고 가야 닿을 수 있는 곳이다. 리틀 김대중의 얼굴을 한 이들이 신기하게 많은 그곳에서 난 귀가 씻기는 경험을 한다. 6학년을 맡고 처음 맞은 주말 휴일에 언제나 그랬듯이 학교 창고 곳곳을 살피는 도중(창고의 물건을 파악해 놓으면 1년이 수월하다) 구석 깊숙이에 박혀있는 인켈 오디오(8300모델)를 발견했다. 한 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그 녀석은 2~3년 전 인근 분교가 폐교되어 그곳 짐이 이곳 창고에 온 이후 방치되었던 것들이다. 아마도 음악에 깊은 조예를 가진 어느 분교장 선생님에 의해 이곳에 온 오디오는 얼치기 오디오맨인 나의 눈에 띠어 6학년 교실로 옮겨지게 된다. 3명이 전부인 그 교실에서 가장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지만 오디오잭, 리모컨 등 부속품이 없어 한동안 목포를 드나들며 발품을 판 끝에야 첫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저녁을 마친 어느 여름날 밤, 혼자 남아 조수미 가곡을 듣는 순간, 하의도 섬마을 2층 교실은 프리마돈나의 단독콘서트 장으로 바뀌었다. 감동적이고 놀라운 경험이었다. 우리 6학년 네 명은 최고 음질로 음악에 매료되어 행복했다. 몇 가지 이유로 1년 만에 하의도를 떠나올 때 못내 아쉬운 것은 6학년 교실의 인켈 오디오였다.

 

#4. 2017년 루카스

한 번 좋은 소리를 경험하고는 늘 오디오에 대한 갈망이 커져만 갔으나, 아파트라는 현실적인 공간은 늘 언젠가는 나만의 음악실을 가고야 말겠다는 소망으로만 머물게 한다. 우연히 산책 중에 들른 집 앞 갤러리 카페 [루카스]는 최고 성능의 오디오를 보유하고 있다. 난 그곳을 아지트 삼아 4년 째 귀호강을 누리고 있다. 손님이 뜸한 시간(6시 퇴근 즈금)에 일부러 찾아가면 1시간쯤 카페 이상의 볼륨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특혜를 누린다. 사람 좋은 주인장은 슬쩍 자리를 피해주고 난 여기저기서 묻혀왔을 무겁고 번잡스러운 것들을 씻고 집에 돌아갈 수 있다. 좋아하는 보첼리의 시디를 기증한답시고 집에서 못한 온전한 음악 감상실에 앉아볼 수도 있다. 누구에게나 자랑한다. “나는 루카스가 집에서 가까워요.”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나도 오디오에 관한한 미신이 있었던 것 같다. 비쌀수록 좋다는, 그래서 루카스의 그 명품 오디오를 내게 팔라고까지 했다. 저자는 1억원짜리 오디오가 100만원짜리 오디오보다 더 감동적인 소리를 들려주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자기가 원하는 소리, 귀가 듣고 싶어 하는 소리, 음악적 취향에 따라 지금 가지고 있는 오디오, 가능한 예산을 잘 조합하여 최상의 음악을 듣게 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라고 했다. 클래식은 작곡자나 장르 구분도 하지 못하는 수준이고, 팝부터 가요, 국악, 송가은 트롯까지 장르 불문하고 귀에 감기는 소리는 다 좋아하는 음악적 취향이면 지금 있는 것 가지고도 충분하단다. 학교 사무실에 있는 PC용 브릿츠, 시골집에 둔 아내의 아가씨 시절 인켈 보급형, 지금 아파트 거실에 놓인 저가형 야마하도 나름 만족스럽다. 가장 좋은 것은 출퇴근길 듣는 카오디오다. 난 음악을 좋아하는 것이지 폼나는 오디오를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저자의 조언대로 내 귀에 솔직해지고 나니 마음이 편하다. 조금 더 공부하고 알아봐서 거추장스럽지 않은 오디오를 조립해봐야겠다. 난 요즘 30호 가수 이승윤의 노래에 푹 빠져 있다.

2021년 6월 3일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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