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

짱구쌤 2021. 5. 31. 22:18

스토리의 힘,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 / 태 켈러 / 돌베개 ]


조아여

한국인 3세 미국작가가 쓴 이야기는 할머니, 고사, 떡, 쑥과 같은 우리에게 익숙한 정서가 가득하다. Black lives matter를 유행시켰던 플로이드 사건의 불똥이 아시아인혐오로 잘못 튀고 있는 시점에 소수민족(?)의 정서를 노래한 작품이 뉴베리상을 받아 좀 어리둥절하다. 미국의 다양성과 이중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조아여(조용한 아시아 여자애)로 살기 싫은 릴리를 주인공으로 한국인 할머니 ‘애자’에게 들은 호랑이 이야기가 중심을 잡는다. 도망치듯 한국을 떠난 엄마를 따라 도착한 미국은 할머니에게 얼마나 낯설었을까? 못하는 영어를 대신해 준 것은 부지런함, 호의, 숨긴 쾌활함 같은 것 이었을 터, 할머니의 내면을 굳건히 지켜준 것은 용감함과 인내.
“할머니가 괜찮으리란 걸 어떻게 아셨어요?”
“몰랐어. 그래도 나는 나를 믿었어. 그리고 믿으면 용감해. 가끔은 믿는 게 세상에서 가장 용감해.”(65쪽)

 

정체성

그렇게 용감하던 할머니가 치매를 앓으며 쇠약해져 가는데, 손녀 릴리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그 호랑이가 할머니를 뒤쫓아 위험해 빠트리고 있다고 믿는다. 할머니를 구하기 위해서는, 할머니가 앗아간 이야기를 내놓을 때까지 결코 물러서지 않을 호랑이를 잡기로 하고 덫을 놓는다.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한 이 소설은 한때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을 애써 잊으려했던 ‘조아여’ 시절을 지나 다시 그 정체성을 찾으려 몸부리 치는 과정에서 탄생한 듯하다.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특별함’이 바로 그들의 ‘평범함’이기에 일찍이 윌든의 소로우는 ‘자기’를 ‘자기 이야기’를 말하고 쓰라고 했다.

 

가끔 엄마가 생각하는 나는?

사실 이 소설은 흥미로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호랑이 이야기에 너무나 익숙한 우리(적어도 나에게는)에게는 좀 지루한 설정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모든 좋은 소설이 그러하듯 이 책도 놓치기 아쉬운 좋은 문장들이 많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어린 사람이 나이든 사람에게 갖는 쉬운 편견을 보여주는 것들이 특히 그렇다.
하지만 나는 화가 난다. 가끔 엄마가 생각하는 나는 완전히 다른 아이이기 때문이다. 진짜 내가 아닌, 나와 비슷한 아이를 나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71쪽)
지금까진 그저 불평 많은 도서관지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건 이 사람의 한 조각만을 보았던 것이다. 조의 이야기는 그 조각보다 훨씬 크다. 조에게는 내가 영영 모를 수도 있는 지금까지의 삶이 있었다.

 

누구나 스토리가 있다

누구에게나 스토리가 있다. 아이건 어른이건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그 스토리를 들을 수 있다. 스토리를 듣고 나면 다른 사람으로 보인다. 교실에 존재하는 아이들에게 고루 나눠져 있던 시선을 몇몇에게 고정하면, 그것이 단 몇 분이라도 스토리를 발견할 수 있다. 독특한 습관, 말투, 지향성이 읽히면 누구든 스토리의 주인공이 된다.
조연과 주연의 차이는 죽음의 순간에서 확연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지는 조연이나 엑스트라와는 달리,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물러나는 이가 주인공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고유성, 특별함이 튀어나올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주어야 한다. 한 번 뿐인 삶에서 누가 뭐래든 주인공으로 살기 위해 우리가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냥 귀여운 아이들 중 하나였던 1학년 꼬마가 내가 있는 흔들의자에 앉는다.
“하늘을 맑고, 새들은 크게 노래하고, 바람은 살랑이고, 꽃은 더 없이 예쁘게 피어서 좋구나.”
“그리고, 짱구쌤이 함께 있어서 더 좋아요.”
“....”
그 날부터 아이는 주인공이다. 이 순간을 잡아서 내 심장 가까이에 두고 싶다.(67쪽)

2021년 5월 31일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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