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짱구쌤과 팽나무

짱구쌤 2023. 2. 8. 10:15

짱구쌤과 팽나무 - 봉숭아와 조몬삼나무따라하기

[나는 숲으로 물러난다 / 야마오 산세이 / 상추쌈]

 

짱구쌤

저는 이곳에서 한 시간쯤 떨어진 광주가 고향입니다. 20대에 고향을 떠나 직장이 있는 완도, 영암, 신안을 거쳐 지금은 순천에서 주로 지냅니다.

 

팽나무

저는 용방면에서 태어나 아주 오래 이 자리에서 쭉 살고 있습니다. 다른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합니다. 나무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고향에서만 살아갑니다.

 

짱구쌤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것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곳들을 많이 구경하며 살았습니다.

 

팽나무

저는 멀리에서 날아오는 새들, 계절마다 불어오는 바람을 통해 세상 소식을 듣습니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짱구쌤

저는 짱구쌤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이제는 이름보다 별명이 훨씬 편안합니다. 이곳 아이들은 대부분 저의 별명을 부릅니다. 그렇게 부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100년의 반을 넘게 살았지만 여전히 마음은 20대의 그것 같습니다.

 

팽나무

저를 팽할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하고 팽할머니라고도 하지만 뭐라 부르던 나는 팽나무입니다. 내 나이를 나도 잘 모르는데 사람에 따라 150, 200, 250살이라고 합니다. 어떻든 이 근처에서 나보다 오래 된 나무는 없습니다. 나는 누구보다. 어느 때보다 더 푸르고 풍성합니다.

 

짱구쌤

저는 키가 작고 몸도 호리호리합니다. 점점 머리숱은 적어지고 주름은 늘어만 갑니다. 하지만 여전히 목소리는 크고,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부지런히 걸어 다닙니다.

 

팽나무

옆에 있는 은행나무나 메타세콰이어는 나보다 훨씬 키가 큽니다. 한참 어린 나무가 어느 순간 나보다 커지는 것에 어리둥절했는데 내가 가진 너른 품에는 따라올 수 없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더욱 단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이젠 다른 나무와의 비교에 그리 신경 쓰지 않습니다.

 

짱구쌤

저는 당신을 거의 매일 봅니다. 아침에 일어나 관사 현관문을 열고 나와서 본 당신 모습은 언제나 멋집니다. 잎이 없는 근육질의 지금 모습도 그렇고, 막 새잎이 달리기 시작하는 이른 봄이나, 한여름의 무성함, 가을 단풍 모두 아름답습니다.

 

팽나무

저도 당신을 매일 봅니다. 날마다 예외 없이 이곳을 지나고 한참동안 머물다 가는 것을 느낍니다. 당신 말고도 나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난 그들이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짱구쌤

모두가 없는 해질녘, 당신 곁에 있는 정자에 누워 바람을 느끼는 시간을 가장 사랑합니다. 지난 여름 코로나로 일주일 관사 격리에 들어갈 때, 당신의 푸름과 우아함이 없었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팽나무

가장 좋을 때는 아이들이 나를 오르는 것입니다. 트리 클라이밍이 있을 때면 아이들의 까르르 웃음소리와 감탄에 나도 덩달아 신이 납니다. 당신의 관사에 불이 켜져 있으면 나도 좋습니다. 하지만 나는 홀로 있어도 외롭지는 않습니다. 사실은 홀로 있지 않습니다. 수많은 새들이 나에게 깃들고 그보다 더 많은 벌레와 생명들이 나와 함께 살아갑니다.

 

짱구쌤

앞으로 이곳에 새로운 학교가 들어섭니다. 80년 넘게 있던 건물들이 사라지고 멋진 캠퍼스가 생길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당신 주위에 근사한 팽나무 공원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팽나무

지금까지 수많은 건물이 세워지고 무너져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변하든 나는 내 자리에서 여전할 것입니다. 멀리 보이는 노고단이 그 자리에 있듯 나도 오래 이 자리에서 있을 겁니다. 그래도 새로운 캠퍼스가 생긴다니 살짝 기대도 됩니다.

 

짱구쌤

나는 이제 1년만 있으면 이 학교를 떠납니다. 지난 3년 동안 많은 것이 좋았으나 당신이 있어 더욱 좋았습니다. 1년은 당신을 더 많이 보면서 지낼 겁니다.

 

팽나무

지금껏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처럼 나를 머물다 떠나갔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기억할 순 없지만 나를 다녀간 수많은 새들이나 바람과 다르지는 않습니다.

 

짱구쌤

날씨가 많이 풀렸습니다. 이제 새잎이 돋겠군요.

 

팽나무

그래서 설렙니다. 당신에게도 새잎이 돋기를 바랍니다.

'책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벌레와 메모광  (1) 2023.04.03
정세현의 통찰  (0) 2023.03.01
긍게 사램이제  (1) 2023.01.30
나무가 되고 싶은 사람들  (1) 2023.01.26
오르한 파묵  (0) 2022.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