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나무가 되고 싶은 사람들

짱구쌤 2023. 1. 26. 21:01

나무가 되고 싶은 사람들

[어제를 향해 걷다 / 야마오 산세이 / 상추쌈]


7,200살 야쿠시마 조몬삼나무
일본 남부 야쿠섬에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조몬스기가 있다. 최소 수령 2,800년에서 최대 7,200년까지 추정하는 삼나무로 섬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지은이의 표현대로라면 부처의 해탈과 예수의 부활 훨씬 이전부터 이 세상에 나와 지금까지 건재하다. 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의 주무대도 이곳 야쿠섬의 숲과 나무들이다. 도쿄 태생의 지은이는 가족들과 함께 이곳 야쿠섬에 들어와 25년간 생활하며 ‘원고향’, ‘자연생활’의 철학을 실천한다. 생태운동가이자 시인인 지은이에게 7,200살 조몬삼나무는 영감의 원천이다. 과학과 서양으로 대변되는 미래와 진보에 대하여, 조금 부족한 어제를 향해 걸어도 된다고 이야기한다. 일본의 ‘소로’라는 평가가 있기는 한데, 사실 좀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월든 호숫가에서 짧은 자연 생활을 한 소로보다는 훨씬 오랜 시간을 일하며 사색하며 글을 쓰며 살았기 때문이다. 8명의 자녀를 낳아 기른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가장 부러운 것은 이로리라는 일본식 난롯가에서 아내와 함께 밤마다 나눈 대화이다. 물론 소주를 곁들인. 초월적이거나 기이하지 않은 성실한 생활인이자 실천 철학가를 만났다. 너무 늦게 말이다. 2001년 63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450살 광양 유당공원 이팝나무
이 책을 선물한 이는 이번 2월에 명예퇴직이 예정된 선배교사 ‘이팝’님이다. 순천과 광양에서 산 적이 있었으니 천연기념물 235호인 유당공원의 이팝나무를 사랑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처음에는 광양읍성을 가리기 위해 이팝나무를 심었다가 어느 순간부터 방풍림으로 역할을 하며 지역민들의 자긍심이 되었다고 한다. 쌀밥나무 정도로 알고 있다가 이팝님과 교우하다 나 역시 이팝나무를 좋아하게 되었다. 우리 학교에 있는 몇 그루의 이팝나무도 작지만 참 아름답다. 이팝님은 늘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안내해 주곤 했는데, 가령 박노해님 시인의 [나눔문화], 그림책 작가 이세 히데코, 좋은 차가 그렇다. 자주 보내 준 박시인의 글사진집을 통해 제3세계 나라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고 작지만 힘을 보태는 일에 참여할 수 있었다. 지금도 이팝님이 보내준 좋은 차는 교장실을 따뜻한 이야기 장소로 바꾸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번에 전해 준 이 책 역시 과문한 나를 분발하게 한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밖을 볼 창이 되어준 분이다. 교실에 있을 때나, 거리에 있을 때나, 교장실에 있을 때나 성실하게 치열하였기에 이팝님의 명예퇴임이 아깝고도 아깝다. 오래전 터를 내린 구례에서 두 번째 삶을 가꾼다하니 그 아쉬움을 조금씩 나눠야겠다. 이팝님의 편지는 늘 이렇게 끝을 맺는다. “여백을 들여 놓고 좋은 숨 기원합니다.” 유당공원 이팝나무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걱정이다.

 

200살 용방초 팽나무
용방초에서의 3년이 지났다. 다 좋았으나 그 중의 제일은 매일 200년 넘은 팽나무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관사 앞에 의젓한 팽할머니(아이들은 그렇게 부른다. 팽수라고도 하고)는 아침에 일어나서도, 저녁 가로등 옆에서도, 뙤약볕이나 눈보라에서도 언제나 멋졌다. 지난해 여름 코로나 관사 격리 일주일을 웃으며 건널 수 있었던 것도 팽나무였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다 가고 난 학교는 나와 팽할머니 세상이었다. 멋지게 지어진 팽나무 정자에 올라 낮 동안 갇혔던 몸과 마음을 쉬이 풀어놓고 드러눕자면 ‘세상 무슨 덕을 지어 이런 복을 누리나’ 스스로 대견해했다. 팽나무 옆 오래된 정자는 어른들의 운치와는 별개로 아이들이 잘 가지 않는 음침한 곳이었다. 어떻게 하면 핫플이 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리모델링 공모를 했고 다수가 채택한 다락 정자로 탈바꿈 하는 순간(주무관님의 기술에 나의 노가다가 빛난), 하루 종일 한가할 새 없는 명소가 되었다. 우리가 꿈꿔왔던 [용방마실배움터]에서도 도서관과 배움의 집을 두른 팽나무 공원으로 자리할 것이다. 물론 팽나무는 다치지 않게. 남은 1년 동안 팽나무의 사계를 남김없이 기록하고 즐길 것이다.

 

도깨비에게 사과하노니
전라도 회진에 유배 온 삼봉 정도전은 겨울 어느 날 ‘도깨비에게 사과하는 글’을 썼다. 인적 없고 을씨년스러운 날 방안에서 홀로 잠을 자려는데 도깨비 떼가 들이닥쳐 울고 웃고 떠들어댔다. “왜 여기까지 와서 날 괴롭히느냐?” 방주인이 소리치자 도깨비가 답했다. “인적 없는 이곳은 도깨비가 사는 곳이다. 그대는 사람들 사이에 끼지 못하고 멀리 쫓겨났는데, 우리가 반겨 놀아주니 고마워해야 할 것 아닌가?” 삼봉은 타의에 의해 유폐되었으나 홀로 오래 지내며 파란만장했던 삶을 돌아볼 기회를 가졌다. 그의 꿈이 현실에서는 깨졌을지 모르나 도깨비에게 사과까지 했으니 인간 삼봉은 더욱 성숙해졌을 것이다. 자발적 유폐. 이 책의 지은이가 외딴 섬으로 들어간 것이 그렇다. 그가 생태주의의 선구자로 많은 이에게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은 그 유폐 때문이라고 믿는다. 오직 어둠뿐인 용방의 밤을 꽤 오래 홀로 보냈다. 아니 팽나무와 산새와 밤하늘과 보냈다. 그러니 나에게도 혜안과 온유함이 찾아올 것이다. 도깨비라도 찾아올 것이다.
2023년 1월 26일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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