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긍게 사램이제

짱구쌤 2023. 1. 30. 14:56

[아버지의 해

방일지 / 정지아 / 창비]

 

산림조합 장례식장

우선 익숙한 지명이 등장한다. 소설의 무대가 구례인 탓이다. 구례중앙초를 나온 주인공 모녀는 문척 다리를 건너다녔고, 오거리 수퍼에서 담배를 나눠 피웠으며, 아버지의 마지막은 산림조합 장례식장이었다. 그곳에서 3일간 치른 장례가 소설의 주된 이야기이다. 4년을 빨치산으로 살다 위장 자수, 투옥, 재수감을 거쳐 평생 빨갱이의 천형을 안고 산 아버지가 치매를 앓다 전봇대에 부딪혀 죽는다. 장례식장을 찾은 사람들과 얽힌 이야기는, 얼핏 무거울 거란 우려를 씻고 시종 유쾌하고 감동적이다. 작가의 내공이다.

 

빨치산의 딸

1988년에 읽은 이태의 [남부군], 1989년의 [태백산맥]은 반쪽짜리 역사를 거부하던 청년학도에겐 새로운 세상이었다. 남북 양쪽 모두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빨치산 이야기는 분단의 현실과 겹치며 더욱 드라마틱한 상상력을 자극했다. 뒤이어 나온 [빨치산의 딸]은 그 정점을 찍는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빨치산 무대였던 지리산과 백아산(실은 백운산)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지었다는 정지아는 25살의 문창과 졸업생이라 믿을 수 없는 이야기꾼 실력을 보여주었다. 작가는 이 같은 평가에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실록이라며 작가라는 주변의 호칭이 부담스러웠다 술회한다.

 

내가 알던 아버지는 진짜일까?

평생 좌익 부모의 외동딸로 살면서 겪었을 차별과 체념을 앞자리에 세울 만도 한데 이야기는 재미와 감동을 쉼 없이 선사한다. 평생 불화한 동생과 가족들, 토벌군 출신 35회 동창 박선생, 민노당원 동식, 장례식장 주인 황사장, 감옥 빨치산 동지들(전향과 비전향), 월남 상이용사, 오거리 수퍼 노랑머리 손녀 등 구례 어디에서나 마주칠 법한 사람들 이야기가 살갑다. 4년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82년을 살면서 좌우를 막론하고 고향 사람들과 잘 지낸다. 보증으로 돈을 떼인 적도 두 번이나 되고 철 지난 빨갱이 타령으로 많은 이들에게 데이고도 오죽했으면 그랬것는가? 긍게 사램이제.”라며 사람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는다. 새로운 인물과 만날 때마다 알게되는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에 어리둥절, 내가 알던 아버지의 모습은 진짜였을까? 양주는 제국주의 술이라며 한사코 소주만 드셨다는 아버지는 딸이 보내준 시바스 리갈을 소주 1궤짝으로 바꿔 마시고, 귀하게 얻은 로얄 살루트 32년산은 양주나 아이나 알도 못하는 것을 멀라고 보냈냐? 쐬주랑도 안 바꿔준다드라.”라며 혀를 찬다. 속이 놀놀한 다섯 살짜리 딸 때문에 하동댁 궁댕이 두들겼다가 술 한잔도 못하고 실비집에서 나와야 했던 이야기는 두고 두고 웃음이 나온다.

 

대촌 저수지 겨울 낚시

빨치산의 딸은 뭐라 해도 아버지와 어릴 적 갔던 물놀이, 늘 목말을 태우고 동네방네 다니던 따뜻한 아버지를 기억한다. 늘 원칙주의자였던 아버지는 현실을 살아야 하는 엄마와의 논쟁에서 불리해질 때쯤이면 자네는 무엇을 위해 그 산에서 고생을 하며 견뎠는가? 라며 마지막 남은 빨치산 엄마의 자존심을 건드려 승리한다. 이미 아버지가 쥔 패를 다 알고 있는 놀놀한 딸은 그래서 부모가 밉지 않다. 오래 전 돌아가셔서 다른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뚜렷이 기억나는 장면이 나에게도 있다.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눈이 겁나게 오던 날,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이웃집 윤선생과 함께 대촌 저수지로 낚시를 갔다. 시외버스에서 내려서도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저수지에선 고기 한 마리 낚지 못했고, 언 손을 불며 눈을 녹여 버너불에 라면을 끓여 먹었다. 손이 곱아서 젓가락질도 힘겨웠지만 그때 아버지와 먹은 라면과 풍경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질 않는다.

 

질 게 뻔한 싸움

오거리 수퍼집 손녀 노란머리의 어머니는 베트남 사람이다. “우리 엄마 한국어 전공한 인텔리에요.” 라며 손찌검 당한 엄마를 애써 두둔한다. 돌아가신 아버지와는 맞담배 피던 동지였고, “너희 엄마 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국을 이긴 곳.”이라며 중퇴한 노란머리에게 검정고시라도 봐서 독립하라고 부추긴 친구 사이다. 이십대 끓은 피에 선택한 입산은 질게 뻔한 싸움이었지만. 지금도 사회주의자 아버지에겐 절대 이길 수 없는 자본주의 세상이지만 쫄지 않고, 비관하지 않고, 웃음을 잃지 않고 살다 마침내 해방된 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리울 것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처럼 나도 내내 흘러내리는 눈물과, 종잡을 수 없는 웃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책을 덮었다. 어디 아버지의 이상만 그러할까? 구례 읍내를 자주 어슬렁거려봐야겠다. 누구나 이야기가 있고 운이 좋으면 그를 만날 수도 있을테니.

2023130일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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