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못한
긴장 속에 부임한 첫날부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코로나가 펼쳐졌습니다. 아이들 없는 학교에서 교장으로 한 첫 번째 일은 ‘결재 놀이?’였습니다. 다행히 함께 힘을 모으니 학습 꾸러미 전달이나 온라인 입학식, 칸막이 급식실 같은 혁신 아이디어도 나오더군요. 교장으로서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책 읽어주기 동영상을 올리기 시작했고, 수면 아래 서툰 발버둥은 코로나로 간신히 감추어졌습니다.
뿌듯함과 아쉬움
아이들이 학교에 나오니 예전의 교사 본능이 살아나고, 아침맞이나 수업을 하면서 서서히 용방에 스며드는 기분이 들어 안도했습니다. 책임감 넘치는 용방 가족들 덕분에 초유의 위기 상황도 어렵지 않게 넘을 수 있었습니다. 자격연수로 오랜 공백 중에 들른 자전거 마라톤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상쾌하고, 아이들 웃음 소리는 경쾌하고, 내 힘으로 달리는 자전거는 가벼웠습니다. 삶의 어떤 절정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이 행복이 결코 나 혼자만의 그것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는 순간이었습니다.
조금 더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마주할 수 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움이 남습니다. 교실과 사무실에서 어떤 기쁨과 어려움을 느끼는지 잘 들었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우리 그거 해봤어.”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조금 더 인간적으로, 가깝게 이야기를 나누는 공동체를 꿈꿉니다.
모퉁이를 돌면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나타날지 기대돼요.” 우리의 빨간머리 앤이 말합니다. 어려움을 미리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설렘으로 받아들이는 사랑스러운 앤처럼 저도 2021년 2년 차를 기다리고 싶습니다. 상상하는 것이 모두 현실이 될 수 없다고 하지만, 지금이 누군가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것임은 분명합니다. ‘선한 상상력’ 좋은 쪽으로 상상하면 좋은 일들이 생긴다고 믿습니다.
부족하고 서툰 일 년이었지만 함께 만든 시간이었기에 뿌듯합니다. 고쳐 쓰고 다시 쓰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장규가 더 나은 교장이 되고 용방이 더 좋은 학교가 되도록 애쓰겠습니다.
2020년 1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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