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남아 있는 나날

짱구쌤 2018. 11. 17. 10:11

 

 

저녁은 하루 중 가장 좋은 때

[남아 있는 나날 / 가즈오 이시구로 / 민음사]

 

품위

주어진 시간은 5. 30년 가까이 보아왔던 것 중 가장 빠르게 말하고 있었으나 긴장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다 했다. ‘생태교육 전문가로서 품위를 잃지 않았으니 그곳에 모인 이들의 박수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교육감께 직접 생태교육에 대해 건의할 것이 있다며 생전 하지 않던 압력을 행사했고, 내심 바라던 바였으니 난 읍소하며 자리를 주선했다. 텀블러를 선물 받은 교육감은 한동안 의무감뽀데사이에서 갈등할 것이다. 모두 그녀의 의도대로다. 면담 뒤에 보낸 메시지도 세다.

선배, 좋은 기회 마련해줘서 고맙습니다. 반영이 잘 되면 으싸으싸 해볼 거고, 잘 안되면 지금 전남교육의 상황이 여기까지라고 여기고 대외적으로 나서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자꾸 능력 밖의 일로 나서고 있는 듯해서 자제하려고 하는데 부르는 데가 많아져 고민스럽습니다.”

 

집사

내 직위에 상응하는 품위

평생 영국 명문가 달링턴 홀에서 충직한 집사로 보낸 스티븐슨이 생각하는 품위이다. 엿새간의 생애 첫 휴가 여행을 떠난다. 젊은 날 떠나보냈던 사랑하는 켄턴양을 찾아간다. 평생 모셨던 달링턴 경이 나치 협력자로 드러나고 그 우아한 곳에서 만났던 수많은 명망가들의 민낯을 확인하는 순간에도 스티븐슨은 직위에 상응하는 품위를 지키려 애쓴다. 엄청 중요한 회담이 열리던 날, 아버지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으며, 그보다 더 중요한 회담이 열리던 날에는 켄턴양의 이별도 지켜내지 못했다.

 

저녁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는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300

옛 연인 켄턴양과의 아쉬운 만남을 뒤로하고 엿새간의 여행을 마무리하는 스티븐슨이 항구도시에 앉아 석양을 맞는다. 은퇴한 노신사가 들려준 이야기다. 자신이 평생 신봉했던 가치에 대해 회의가 밀려오고 대의(?)를 위해 미뤄두었던 것들, 가령 사랑이나 가족 같은 의미가 더 멀리 사라져 간다고 느껴질 때였을 것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남아있는 날들이 있다. 시간과 먼지를 견뎌온 것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퇴근과 퇴직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한 시간들인가? 클래식FM 6[세상의 모든 음악] 전기현의 오프닝은 한결 같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꿀 같은 저녁의 시작이다.

20181117일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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