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

짱구쌤 2018. 9. 15. 15:17

 

세월은 가끔 인간의 등을 두드리기도 한다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참 좋았다 / 곽재구 / 해냄]

 

1991년 익금분교

4학년이 되었다. 선배들은 현장으로 떠났고 교대에 밀어 닥친 임용고시(종대안)의 파고는 실로 높아서 총파업의 거친 대응도 그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겨우 수습이 될 즈음 후배들의 잔류 요청이 들어왔다. 남을 기세도 뿌리칠 용기도 갖지 못한 체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함께 도모했던 선배에게 묻고 싶어 무작정 찾아간 곳이 익금이었다. 시외버스, , 다시 군내버스를 갈아타고 도착한 곳에 그림 같은 바닷가에 분교, 선배가 있었다. 무거운 책임만 맡기고 와서 미안하다던 선배와 바닷가에서 소주잔을 나누고 올려다 본 별, 곽재구 시인은 금빛 모래알이 모두 날개를 달고 하늘로 올라갔으면 했던 바로 그 별들이다. 궁핍하기만 했던 절망의 시절에 찾았던 시인의 절박성만큼은 아니었어도 나에게도 그 곳은 翼金으로 남아있다. 좁은 단칸방에 재워주고 가난한 후배에게 용돈까지 쥐어주던 선배였다. 충전하고 돌아와 잔류를 결심했다. (6개월을 넘기지 못했던)

 

이름과 내력

시인은 지도나 안내서의 지명을 확인한다. 이름으로 꽂힌 곳을 찾는다. 찾아가서 내력을 묻고, 내력을 몸으로 살아온 이들을 만나 묻고 듣는다. 대부분 젊은 날에 찾았던 곳을 다시 방문하고 쓴 글이다. 그래서 포구기행인데 포구기행이 더 어울릴 듯싶었다. 이름 자체로 궁금한 곳, 기별포, 격렬비열도, 두미도, 격포, 하슬라, 와온 등이 그렇다.

인생에서 내게 제일 행복한 시간중의 하나는 밤의 섬마을에서 파도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것이다. 하룻밤 내내 파도소리를 듣고 일어난 아침이면 마음 안의 텅 빈 공간들이 알 수 없는 꿈으로 채워지는 걸 느낀다. (79)

내게 제일 행복한 시간은? 짐짓 역사적이고 거창하며 교육적(?)이라고 했지만 치사하고 비루했던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라디오를 듣는 시간, 잠자기 전 펼쳐본 짧은 책 읽는 시간, 주중의 치열한 전투를 끝내고 느긋하게 일어나 글 쓰는 주망 아침시간쯤이 될 것이다. 하지만 두 달 전까지는 단연 아침 시간이었다. 가장 먼저 들어선 교실에서 창문을 활짝 열고 볼륨을 높여 음악을 들으며 찻물을 끓이던 시간. 첫 아이가 도착하기 전까지의 그 20여분. 온전히 내 일터에서 내 손으로 준비하는 설렘과 여유.

 

애절양(哀絶陽)

배낭에 이번 여행의 도반들을 챙긴다. 사과 두 알, 귤 한 봉지, 찐 고구마, 홍주 작은 한 병, 설아차 한 줌, 애절양(哀絶陽), 칼 세이건의 말, 심야 이동도서관세 권의 책도 함께 챙겼다. 점심 대용이 될 찐 고구마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이번 여행길에 만날 어른을 위한 준비물이다. (129)

도암만보다 아홉 개의 강이 모인다는 구강포라 불리기를 좋아하는 그곳을 찾아가는 시인의 설렘이 봇짐에서 느껴진다. 두 가지(소주, 반 박자 쉬고 들어가는 노래)를 못한다는 시인이 홍주를 챙겨 떠난 곳에 다산초당과 백련사가 있다. 고구마를 제외하고 나머지 것들은 다산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들이다. 다산 시대에는 없었을 사과를 맛보게 하고 싶고, 귀양시절 귤동마을을 생각해서 감귤을, 수많은 다산의 저작에 나오는 술을 대표해서 홍주를, 초의선사와의 차 한 잔, 그리고 우주와 이승에 대한 상상력을 위해 칼세이건과 이동도서관, 마지막 애절양. 가슴 미어지는 애절양이 없었다면 유래 없는 방대한 실학연구가 가능했을까를 이야기한다. 맞다. 시인은 착한 사람이어야 한다. 보이지 않은 것들과 말하지 않은 것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시가 별것인가요. 입이 없고 손이 없고 발이 없는 것들과 함께 걷고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거예요. 그러다 해가 지면 함께 잠들고 해가 뜨면 함께 새날의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345)

가르치는 것이 별건가요? ‘다만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했듯이 어깨에 힘 빼고 배우고 가르치는 것일테죠. 아이들과 함께 걷고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것.

나도 조만간 시인처럼 가을 햇살과 차 향기의 바다를 따라 걸어보고 싶다.

2018915일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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