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풍경과 상처

짱구쌤 2018. 7. 22. 09:29

 

속수무책(束手無策) 기진맥진(氣盡脈盡)

[풍경과 상처 / 김훈 / 문학동네]

 

강진만의 바다는(중략) 혼백으로 돌아오는 생산자의 바다가 아니라, 거세된 바다의 추상형이다. 원양의 거센 출렁임은 희미한 풍문처럼 이 부복한 바다의 물 위에 와 닿는데, 원양의 풍문은...(본문 49. 1994)

고문 중의 고문이다. 연일 폭염은 경신되는데 글은 어려워 허공을 떠돈다. 이유는 두 가지. ‘일요일 아침 산만한 읽기까지 빨리 읽어야 한다는 부담 한 가지, 김훈식 문체가 완성되기 전 1994년 글이라는 또 한 가지.

책읽기 모임이 일주일 연기되고 다시 천천히 들여다본 글은 조금 달랐다. 역시 김훈! 아직 대중과 친절하게 소통할 준비는 거칠었지만 글의 힘은 강력했다. 물론 그는 문학의 역할이나 힘에 대해 냉소적이지만, ‘남남으로서 나는 그렇게 느낀 것이니 서로 복된 것이다.

육지로 길게 들어온 강진만을 보고 다산의 유배생활을 되짚는다. 치욕을 발설하지 않는 대학자의 은둔이 원양에서 멀어진 강진 구강포 바다의 잔잔함을 떠올린다. 그 풍경을 다산의 상처로 바라본다. 글쟁이의 자유다.

 

자전거를 저어서 나아갈 때 풍경은 흘러와 마음에 스민다. 스미는 풍경은 머무르지 않고 닥치고 스쳐서 불려 가는데, 그때 풍경을 받아내는 것이 몸인지 마음인지 구별되지 않는다.(중략) 몸은 바람 속으로 넓어지고 마음은 풍경 쪽으로 건너간다. 나는 몸과 마음과 풍경이 만나고 또 갈라서는 그 언저리에서 나의 모국어가 돋아나기를 바란다.(자전거여행2. 2014)

자전거를 저어간다고 표현하는 사람의 글은 아름답다. ‘한국 문단에 벼락같이 떨어진 축복이라는 찬사가 민망하지 않다. 그의 자전거 여행 책을 읽고 게으른 자전거 타기를 시작했고 부끄럽지만 그의 글처럼 군더더기 없는 글을 쓰기 위해 흉내 내는 중이다. 그가 50에 글을 쓰는 신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더 없는 힘이 된다.

 

2000년 가을에 나는 다시 초야로 돌아왔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한 남으로서 서로 복되다.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서 살 것이다.(칼의 노래 서문. 2001)

 

저는 초로의 나이에 겨우 혼자서 쓰기 공부를 시작한 백면의 서생일 뿐입니다. 이런 은성한 상을 받게 되는 일이 팔자에 없어도 좋았고, 또 상을 받게 되었다고 해서 돌연 사유의 전환이나 확장이 있을리 없으니, 이런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해야 덜 민망할 것인지 난감한 일입니다. 다만, 조금은 더 써야 할 것들이 남아 있으며, 지금 그 남은 것들을 겨우겨우 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 난감함을 위로할 뿐입니다. 생사의 급박함을 스스로 알아서 사람 모이는 대처에 나다니지 않고 혼자서 처박혀서 한 글 한 글 쓰도록 하겠습니다. 무리를 아늑해하지 않으며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동인문학상 수상소감 중)

못 말리는 김훈이다. [시사저널] 편집국장 시절, 라이벌인 [한겨레21] 인터뷰에 응해서 자사의 잡지를 폄하하고 논란거리(페미니즘 비하, 재벌 옹호, 통일 비관 등)를 제공한 일로 사표를 내고 초야로 돌아간다. 사회주의 붕괴, 밀레니엄 쇼크 등(순전히 내 생각) 등 혼란기에 전업 작가가 된 것은 오히려 행운이다. 그는 철저히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사투하며 한 자 한 자 원고지에 눌러 쓴다. 당시 인터뷰에서 B급좌파 김규항과 최보은이 결론 내린 것처럼 나도 그와 생각이 다르지만 무리를 아늑해하지 않으며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는 말에 그의 글을 신뢰한다. 그는 온힘을 다해 글을 쓰는 스타일이어서 자주 기진맥진한다. 내가 요즘 그렇다. 그의 파상공세에 속수무책이며 기진맥진이다. 당분간 그럴 것이다.

2018722일 이장규

'책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의 역사  (0) 2018.09.02
어디서 살 것인가  (0) 2018.07.31
워낭  (0) 2018.06.17
그림은 위로다  (0) 2018.06.09
어린왕자  (0) 2018.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