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워낭

짱구쌤 2018. 6. 17. 10:21

 

소에게도 그럴진데 하물며

[워낭 / 이순원 / 실천문학사]

 

무명씨들

흰별소, 미륵소, 버들소, 화둥불소, 홍걸소, 외뿔소, 콩죽소, 무명소, 검은눈소, 우라리소, 반제기소. 강원도 우추리 차무집에서 산 120, 12대 이야기. ‘세상의 수레바퀴는 이름 모를 무명씨들에 의해 돌아간다는 믿음으로 쓴 글이다. 순천One city one book으로 선정된 바 있는 [나무]에서도 그랬듯 작가는 사람과 자연의 섭리를 이야기한다. 무릇 모든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한 경배이며 그것들과의 공생이자 조화이다. 이야기 초반, 우리에 매인 일소의 꿈에 나타난 큰뿔들소가 말한다. “사람과 일소가 맺은 생업의 우정이 부럽다.” 옛 사람들은 소를 일꾼이자 가족으로 대접했다. 차무집 어른은 더위에 들 일 하는 흰별소에게 자신의 밥을 넣어주고, 며느리는 불같은 성질의 화둥불소를 자식 대하듯 살갑게 보듬는다.

 

牛步千里우보천리

소걸음으로 천리를 간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우직하게 걷는 이들의 좌우명이다. 평생 동서 문명 교류학에 천착한 정수일 교수 덕분에 알려진 문구이기도 하다. 조선족으로 태어나 베이징과 평양에서 공부하고 서울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고정 간첩 깐쑤로 알려진 영화 같은 인생, 정수일. 수형 후 팔십 노구에도 문명교류학의 첨병으로 분투하는 모습은 우직한 소, 딱 그것이다.

얼마 전 끝난 지방 선거에서 소걸음으로 37년을 교사로 걸었던 한 후보가 교육감에 당선되었다. 투옥과 해직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이들 곁을 지키고자 했던 평교사의 투혼이었다. 그의 당선이 반가운 것은, 집념으로 일군 권력에 대한 한풀이가 아니라 묵묵히 한 길을 걸어온 우직함 때문이다. 그의 교육포럼 사무실 입주식에 내가 좋아하는 문구를 걸어 두고 왔다. 어리석은 자의 우직함으로 세상은 조금씩 바뀌어 갑니다.’ 쉬운 지름길(첩경)을 찾으려는 마음을 다잡기는 쉽지 않다. 첩경에 연연하지 않고 제 걸음으로 우직하게 걸어가기를.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

어릴 적 동요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에 무감했던 우리들에게 1990년대, 가수 정태춘이 질문한다. 왜 얼룩송아지냐고? 5·18이후 미국의 책임론이 나오면서 한껏 고양된 민족자주의 발로였을진데, 난 그의 읊조리는(지금의 랩?) 스타일과 시 같은 가사가 그냥 좋았다. 나중 광우병 파동에서도 한차례 주목받은 바 있었지만 정태춘은 1990년대 이후 흔들리는 우리 사회의 정체성만큼 멀찍이 떨어져 있다. 하지만 그가 간절하게 바라며 실천했던 ! 대한민국에 대한 절창이 작년의 촛불혁명과 요즘의 남북 화해 시대에 닿았다고 믿는다. 누렁송아지와 얼룩송아지가 고운 흙내음 맡으며 평화롭게 지내는 시대에 다가가고 있다.

 

휴일삼분지계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와 비슷한 책략이 내게도 있다. 휴일을 잘 보낼 수 있는 계책인데 읽고 쓰고, 경작하고, 놀고, 이름 하여 휴일삼분지계이다. 일주일간 읽었던 책을 마저 있어 쓰기로 정리하고, 텃밭에서 적당히 땀 흘리고, 나머지는 무장해제 상태로 야구경기를 시청한다. 제갈량의 계책은 얼추 성공했으나 나의 그것은 늘 어렵다. 하필 휴일에 조문갈 일이 생기고, 가끔 전날의 과음으로 오전을 뭉갤 때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큰 난관은 사람이다. 텃밭에 동행 할 이가 없으면 먼 걸음이 쉽지 않고, 야구 시청에 추임새를 넣어줄 이도 아쉬울 때가 있다. 워낭을 달아주고 일할 때나 쉴 때나 정성을 다해 평생지기가 되는 것과 같이, 소에게도 그럴진데 하물며 사람에게는 말해 무엇하랴.

2018617일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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