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37조선왕을 말하다-이덕일

짱구쌤 2012. 12. 30. 22:18

 

 

18년 동안 호랑이를 탔으니 이미 족하다-태종

[조선왕을 말하다 / 이덕일 / 역사의아침]

 

포은 정몽주 피살, 형제들과의 골육상쟁, 처남 셋의 죽임, 아버지 태조와의 불화 등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포악(?)한 군주의 한명으로 불리는 태종이 그의 아들 충녕(세종)에게 양위할 뜻을 밝히자 신하들이 만류한다. 이때 태종이 한말 “18년 동안 호랑이를 탔으니 이미 족하다”

태종은 권력을 호랑이 등에 탄 것으로 여겼다. 자칫하면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수도 있는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호랑이 등에서 내려온 것으로 태종은 악역이 끝났다고 여겼다. 아직도 권력이 호랑이 등에 탄 것이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참 많다.

 

일주일째 읽던 책을 이제 놓는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더니 지난주 가족여행, 연수, 집회 참가 등의 좋은(?) 핑계로 배낭 속의 이 책을 읽지 못해 여간 불편하지 않았는데 조금은 시원하다.

 

역사를 기록하는 붓은 늘 정파적이다. 실상 실록이나 사초도 당시의 당파적 이익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세조시대에 기록한 단종실록(노산군일기)의 내용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이 책의 저자 이덕일은 역사학자이다. 다른 역사학자(저술가)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강단사학자나 주류역사학자가 아닌 대중저술 역사학자라는 점이다. 그가 쓴 여러 책들은 이미 여러 차례 대중의 사랑을 받고 주류 역사학계에서도 무시하지 못할 평가를 받고는 있으되 여전히 주변부에 머무르고 있다. 안타깝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한국사의 천재들], [조선선비 살해사전]은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그간 승자독식 역사기록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각에서 역사를 기록하려고 하는 저자의 의지를 쉽게 엿볼 수 있는 명작들이다. 그가 존경하는 역사학자들은 궁형의 치욕을 딛고 마침내 역사서의 교본이라 일컫는 [사기]를 쓴 사마천, 세조의 단종 폐위를 직접 비판한 김일손, 식민사관에서 벗어나 역사를 자주적으로 기술한 신채호 등이다. 동의하면서 나는 세종시대의 정승 맹사성을 추가하고 싶다. 사관은 아니었으되 세종이 그의 아버지 태종의 역사기록을 보려고 사정할 때 신하로써 참 힘들었을 “아니되옵니다”를 용기 있게 말해 역사의 준엄한 평가를 지켜낸 그도 역사가 만큼이나 존경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총 8명의 조선왕을 다시 평가한다. 악역을 맡은 태종과 세조, 사가들에 의해 부풀려진 연산군과 광해군, 두 전란 속의 선조와 인조, 절반만 성공한 성종과 영조가 그들이다. 그간 많은 역사학자들에 의해 잘못된 오류가 바로잡혀졌으나 여전히 그들과 관련해서는 많은 편견 또한 남아 있다. ‘희대의 폭군 연산군’은 당시 사대부들에 의해 저질러진 왜곡의 대표적 사례이다.

세조는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에 오른 비정의 왕이다. 하지만 나에게 분노와 안타까움으로 다가온 것은 집권 후 그의 정책이다. 한명회 등 단종을 폐위시킨 장본인들을 공신으로 임명한 것까지야 정치적 행위라 인정할 지라도 그 공신을 세습하도록 허용하고 숫자를 계속 늘려 1만영 이상의 법위의 존재(1등 공신은 죽을죄를 지어도 용서한다)를 만들어 낸 것은 요즘 심심찮게 거론되는 고소영 특권층을 연상하게 한다. 특권층을 비호하는 정권은 정당하지 않다.

선조는 더욱 분노를 자아내게 한다. 이순신을 제거하려는 쫌팽이 왕조라는 비아냥은 그의 진짜 모습을 외면한 오류다. 임진왜란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것이야 그의 무능함을 탓할 수 있지만, 전쟁 발발 후 곧바로 도성(경복궁)을 비우고 멀리 북쪽으로 신속히 피난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산 것도 모자라,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몰릴 때 명나라로 망명을 시도하였다는 기록에 이르러서는 왜 백성들의 왜놈에 분노하기보다 왕족과 사대부들을 증오했는지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6.25가 터지자 정작 자신은 대전으로 피신했으면서도 서울을 사수하라고 국민들에게 사기를 치고 한강철교를 폭파시킨 이승만대통령과 어찌도 그리 닮았는지. 쯧쯧..

 

영조에 대한 안타까움은 탕평책에 대한 그의 실패 때문이다. 조선이 당쟁 때문에 후기에 들어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했음을 알고 있기에 그의 당쟁타파 탕평책 실패는 실로 뼈아프다. 노론과 소론을 고루 기용해 선의의 경쟁으로 국정을 이끌어 갔다면 나중 영민한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도 없었을 것이며 성군으로 추앙하는 손자 정조의 개혁 좌절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 돋보이는 인물은 김일경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영조시대 신하 김일경은 선대왕인 경종의 독살에 영조와 노론일파의 가담을 비판했다가 영조에 멸문(滅門) 희생된다. 영조의 직접 국문에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고 일갈한다. 조선 선비의 전형(典型)이다.

 

책을 덮고 답답한 마음에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낸다.[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조선의 500년을 가능하게 했던 사람들의 기백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

2011. 8. 16.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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