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38시원하게 나를 죽여라-이덕일

짱구쌤 2012. 12. 30. 22:20

 

 

너희들의 시대는 나의 시대와는 다른가?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 이덕일 / 한겨레출판]

 

지난 주말 이틀 연속 새벽 3-4시 정도에 잠드는 무리를 했더니 몸이 집 밖에 나갈 생각을 잡아 두었다. 덕분에 뒹굴뒹굴하면서 책 보고, 자고.. [조선왕을 말하다]를 말미에 나온 김일경의 일화가 생각나서 읽다가 오래 전 읽고 꽂아두었던 이 책을 집어 들었다.

 

필자는 서문에서 천주학을 믿었다는 이유로 전 가문이 핍박을 받은 정약종, 정약전, 정약용 형제들을 거론했다. 과연 자신이 당시에 살았더라면 이 ‘세 명의 형제들 중 누구의 삶에 가까웠겠는가?’인데 끝까지 천주교의 정당을 주장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둘째형 약종, 천주교를 버리고 귀양길에 올라 절치부심 학문에 힘써 방대한 茶山學을 완성한 약용, 역시 천주교를 버리고 흑산도로 유배 가서 그곳 어민들과 융화되어 여생을 마친 큰형 약전. 나 역시 필자처럼 조금 비겁해서 큰형 약전처럼 살다가 약용의 흉내를 조금 내보았을 것 같았다. 역사학을 과거학이라 부르지 않고 현재를 직시하고 앞날을 조망하는 미래학이라 부르는 이유를 이렇듯 간단히 입증해 볼 수 있다.

 

조선 왕조 500년을 통해 그 시대의 주류에 편승하지 않고 시대와 맞섰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신라의 최치원, 고려의 천추태후, 한말의 김창숙은 예외) 당대에는 버림받았지만 그 시대를 넘어 우리 시대에 뚜벅 뚜벅 걸어 나온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후대에 비판 받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는 유교를 오직 주자학으로만 해석해서 보수적이었다는 점과 중국에 대해(특히 명나라) 사대주의가 지나쳤다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 소개된 사람들은 그러한 조선의 주류가치에 반해 자신의 주장을 신념처럼 외친다. 특히 양란이후 주자학 유일사상 체계의 페기와 신분제의 완화가 사회체제 변화의 핵심적 요구였던 점에 비추어 보면 시대와는 불화했으나 가장 시대정신에 부합한 삶을 산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허나 어쩌랴? 모든 선각자들이 그랬듯 시대를 뛰어 넘는 그들의 주장이 당대에는 반역이고 궤변이라는데야.

 

남명 조식, 지리산 덕천동 산천재에 은거하며 평생 후학을 양성한 조선의 선비이다. 수차례 조정의 벼슬 제수를 거부하며 지은 ‘단성현감 사직상소’는 지금 읽어보아도 놀랍도록 장쾌하다.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천의와 인심이 떠났습니다....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칼을 찬 선비로도 유명한 그에게 인사를 온 경상감사가 칼을 보고 “무겁지 않으십니까?”라고 묻자 “뭐가 무겁겠소. 내 생각에는 그대 허리춤의 금대(돈주머니)가 더 무거울 것 같은데...”라고 답한 일화는 참 통쾌하다. 그의 칼에는 검명(劍銘)이 세겨져 있는데 “안으로는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은 경(敬)이요. 밖으로 시비를 결단하는 것은 의(義)다.” 후에 스승의 뜻을 이은 후학(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들이 임진왜란에 다투어 의병장에 나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조식이 이황에게 보낸 편지는 이렇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데, 손으로 물 뿌리고 빗질하는 법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남에게서 사기나 당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칩니다.”

책이나 보고 자못 안심하고 스스로 만족하여 작은 실천도 주저하는 나에게 보낸 조식의 경고 서한이다.

 

동학의 접주 김개남, 시대의 여성 허난설헌, 홍경래, 이광사, 박제가, 유득공이 묻는다. ‘너희들의 시대는 나의 시대와는 다른가?’

 

2011. 8. 17.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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