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33다산의 후반생-차벽

짱구쌤 2012. 12. 30. 22:11

 

 

 

大학자 茶山, 사람이었네!

[다산의 후반생 / 차벽 / 돌베개]

다산초당은 영암 집에서 가까운 거리라 해마다 서너 번 이상은 찾아가는 곳이다. 백련사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호젓하고 절집에서 차 한잔 하기에는 그만한 곳이 없다. 물론 우리 집 지정(?) 사찰 무위사만큼은 아니지만, 지금 거실에 놓여있는 소나무 탁자도 백련사 찻집에서 구입한 것이니 그곳과 인연이 작다고 할 수야 없겠다.

 

우선 귤동 마을 초입의 다산전시관에 들른 후 입구에서 전 강진군수이자 다산 전문가인 윤동환씨가 운영하는 찻집에서 차 한잔 하거나 시래기가 맛있는 식당에서 추어탕을 먹는다. 동동주 한잔은 당연히 기본. 야생차나무가 즐비한 다산초당 올라가는 길은 초당 연못에서 흐르는 도랑물 소리에 언제나 즐겁다. ‘뿌리길’로 최근 명명된 그 길은 나무 뿌리가 흙 위로 드러나 상당한 신비감을 선사한다. 초당에 올라 [연지석가산] 폭포(?)물을 손으로 받아먹고 초당(실제로는 와당) 마루에 앉아 땀을 식힌다. 다산이 형 약전을 그리며 생각에 잠겼다는 천일각(?)에 올라 그때 다산처럼 멀리 흑산도에 있는 형님 생각하듯 나도 그리운 이를 헤아려 본다. 오솔길을 걸으며 다산과 혜장스님의 대화를 더듬어보고 백련사 동백꽃길을 지나 찻집에서 아이스크림이나 녹차 한잔 하면서 풍광 시원한(부석사 무량수전의 시원한 눈맛 다음의) 강진만을 둘러본다.

올해는 영암을 떠났으니 못갈 줄 알았는데 6학년 아이들과 1학기를 종강하기 전날 현장학습을 갔다.(달랑 7명, 1명은 미국 아이 청강생) 옛 고향 찾아가는 듯 설레고 즐거운 여행이었다.

 

저자는 강진에서 태어났고 다산선생의 생가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 마재 부근에서 20년을 살았으니 다산과는 참 질긴 인연을 가진 사람이다. 이 책은 다산이 유배길에 오른 1,800년부터 유배 18년이 풀리고 고향 마재로 돌아가 살았던 18년, 도합 36년 다산의 흔적을 찾아 살핀 기록이다. 이른바 다산의 後半生. 뒷부분 참고문헌의 방대함에도 질렸지만 실제 글 역시 꼼꼼하다. 만났던 사람, 다녔던 곳, 쓴 시, 지은 책 등 관련 내용을 남김없이 기록한 데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박석무, 정민, 윤동환 등 다산 전문가들이 있지만 저자인 차벽선생을 모시고 다산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답사 한번 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 나주 율정 주막(지금의 동신대 앞 로터리) 다산은 형 약전과 함께 귀양길에 올라 한양에서 여기까지 같이 내려온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내면 다산은 강진으로 형은 흑산(우이도)으로 헤어져야 한다. 형제는 밤새 목 놓아 운다. 다시는 못 볼 것 같다. 둘째형 약종은 이미 사약을 마신 후였으니 더욱 그러할 것이다. 호방한 기질의 약전은 동생을 다독인다. 지난번 “신지도에서 귀양살이 해보니 바닷가가 참 좋더라. 사람도 순박하고 먹을 것도 많고, 이번 흑산도도 그럴 것이니 너무 걱정 말아라.” 어릴적부터 유독 따랐던 동생 미용(다산의 어릴적 이름)의 귀양살이가 안쓰럽다. 다음날 이른 아침을 먹고 형제는 헤어진다. 가슴이 미어진다.

 

#2. 강진읍 주막집 . 한양에서 대죄인이 강진에 나타났으니 모두들 문 걸어 잠그고 거처할 망을 내주지 않는다. 아전(지금의 세무사) 아들을 둔 한 주모가 선뜻 방을 내주고 다산은 3개월을 꼼짝없이 방콕한다. 권력의 무상함, 귀양살이의 두려움, 가족 걱정, 현지인들의 냉대 등으로 비추어 그러했을 것이다. 이때 나이든 주모가 그를 세상으로 이끈다. 다산의 당시 글을 보면 “세상 풍파 다 겪었을 노주모한테 이런 혜안이 있을줄이야. 내가 크게 배웠다.”라고 기록했다. 아마도 “창창하디 창창한 젊은 양반이 왜 그리도 기가 죽어 사요.” 라고 했을 듯 싶다. 하여간 주모 덕에 동내 아이들에게 글도 가르치면서 서서히 다산은 강진에서 살기 시작한다. 삶의 곳곳에 나를 넘어서는 상수가 있다.(인생 도처 유상수)

 

#3. 다산의 방. 글을 배우러 온 중인 출신 황상(나중 다산 스스로 애제자라 칭함)이 다산에게 이렇게 말한다. “스승님, 저는 세가지 병폐가 있습니다. 무디고, 막혔고. 어근버근(답답함)해서 배우기가 어렵습니다.” 다산왈, “너는 무딘 것이 아니라 소홀함이 없고, 막힌 것이 아니라 지나침이 없고, 답답한 것이 아니라 허황함이 없어 나의 제자가 될 만하다.”라고 제자를 칭찬한다. 제자 황상은 벼슬로 나아가지는 않지만 80평생 스승의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않고 실천한 애제자가 된다. 스승은 모르지기 이렇게

 

#4. 다산초당. 다산은 큰아들 학연에게 편지를 쓴다. “나에게는 소망이 있다. 나중에 해배가 되면, 너희들을 잘 가르치면서 서가에는 서너 권의 책이 있고. 1년을 지탱할 양식이 있으며, 채소, 과일, 뽕나무를 기를 수 있는 텃밭이 있고, 마루를 올라 방에 들면 거문고 하나, 투호 한구, 붓과 벼루가 있는 책상에 낮아 책을 보며 아결함(?)을 즐기며 때때로 찾는 손님과 닭한 마리 안주 삼아 좋은 나물과 함께 흔연히 한잔 배불리 먹고 서로 더불어 고금을 논할 것이다.” 나는 이미 다산의 소원을 거의 이뤘다.

 

#5. 대둔사 절. 다산은 그의 제자 초의와 대화를 나눈다. 초의는 다산의 박식함과 인간 됨됨이에 빠져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하루가 멀다하고 초당을 찾아가 스승에 배움을 청한다. 이번에는 다산이 해남 대둔사로 제자를 찾아 나섰다. 둘은 차를 마시며 동서고금, 유불선을 문답한다. 스승이 화제를 던지면 제자가 답하고 스승은 수정해준다. 정감과 농이 흐르는 배움이 밤새도록 이어진다. 엄격함과 친근함을 동시에 갖춘 스승 다산

 

이 책에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강진 유배시절 생긴 다산의 딸, 강진읍 과부로 알려진 표씨 부인과의 사이에 얻은 딸 이야기다. 다산이 일부러 숨기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금시초문일 만큼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다. 하기야 18년 강진 유배시절, 누가 그를 수발하며 그의 외로움을 다독였을까에 생각이 미치면 우리가 그간 너무 그를 우리와는 먼 사람으로 내버려두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산초당에 모인 제자들의 뒷치닷거리, 살림살이를 도맡은 표씨부인, 유배 후반기 8년을 늦에 얻은 딸의 재롱으로 견딘 다산, 이제야 사람처럼 보이고 그러니 더욱 그의 방대한 연구와 초인적인 의지가 돋보인다. 그도 사람이었거늘..

 

유배중 흑산으로 간 형님 약전은 병들어 죽는다. 살아 생전 다산이 보낸 저서의 초고를 살피며 “언제 미용(다산)과 함께 한 세상 한 형제로 다시 살아 볼 수 있으랴, 이 책을 읽고 이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나는 참으로 유감이 없다. 미용도 또한 유감이 없을 것이다.”

다산은 해배(1818년)후 18년은 고향인 마재로 돌아가 살았다. 강진에서 얻은 표씨부인과 딸은 다음에 마재로 오지만 이내 강진으로 돌아간다.(능히 짐작할 수 있지 않는가?). 그 후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산의 마지막 18년 마재생활은 강진에서처럼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기쁨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주변의 기대, 관직으로 다시 나갈 수 없는 처지, 나이듦, 그리고 강진에 대한 그리움...

다산은 회혼식(50주년)을 3일 앞둔 1836년 2월 19일 마지막으로 부인에게 마치는 회근시를 짓고 회혼식날 조용히 숨을 거둔다. 다분히 사람의 모습을 한 거학의 일생이 막을 내린 것이다. 난 그것을 확인해서 좋았다.

2011년 8월 3일 이장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