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25초원실크로드를 가다-정수일

짱구쌤 2012. 12. 30. 19:30

 

 

가장 두려운 것은 ‘늙어서 낡아지는 것’

[초원실크로드를 가다 / 정수일 / 창비]

 

 

사람들은 저자 정수일을 잘 모를 수 있다. ‘무하마드 깐수’는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나? 1996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단국대 필리핀 교수 무하마드 깐수가 사실은 고정 간첩 정수일 이었다’는 기사를 기억하는가? 사형을 언도했던 검사도 울고, 판결을 한 판사도 그의 드라마틱한 삶을 아파했다던 그 사람, 중국에서 25년, 북에서 15년, 이집트, 알제리 말레이시아 등에서 10년, 남에서 27년(국가보안법 수감 5년 포함)을 살고 있는 세계문명교류학의 대가 정수일. 신영복 님의 [처음처럼] 만큼이나 좋아하는 경구 ‘牛步千里-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를 가르쳐 준 정수일 교수가 쓴 이 책을 참 읽고 싶었는데 이제야 읽었다.

 

생소한 학문 [문명교류학]을 필생의 과업으로 연구하는 학자 정수일 교수는 나 같은 문외한들에게는 그저 놀라움이지만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존경과 찬사를 맡는 대학자라고 한다. 작가 공지영의 책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에서 정교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알려진 “가장 두려운 것은 늙어서 낡아지는 것이다”를 본문 중 저자의 육성으로 직접 들어보자.

 

... 따라서 사색에 사색을 거듭하고 인내심에 인내심을 보태면서 나이를 먹어가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노화하는가 하는 것이다. 노화는 육체적 늙음을 말하는데 그 늙음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늙어서 죽는’ 것보다 ‘늙어서 낡아지는’ 것이다. 인간에게 늙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낡음은 결코 그렇지 않다. 늙음이란 성숙이나 기여를 뜻하지만 낡음은 썩음이나 쓸모없음의 대명사다. 그래서 늙었다고 해서 낡아서는 안되며, 늘 새롭고 젊게 살아야 한다. 한마디로 ‘늙은 젊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며, 흔히 말하는 노익장(老益壯)의 본새다. -분문 433쪽에서

 

범지구적인 문명교류의 통로였던 실크로드의 3대 길(오아시스, 해상, 초원) 중 하나인 초원 실크로드에 대한 실록기행문이다. 중국과 몽골, 러시아, 시베리아를 관통한 2년간의 기록을 통해 그간 미개하다거나 악랄하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그 문명사적 의미를 애써 외면해 온 기마유목민족의 눈부신 문화의 힘을 보여주었고, 우리 민족 고대사의 찬란했던 전성기 고구려와 발해 유적을 직접 살피며 바이칼호수에서 시원하여 한반도까지 이어진 문명의 전파를 실증한다.

 

그중 관심 있게 읽은 대목은 몽골에 대한 기록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나라를 일군 몽골제국은 우리에게 참 미미한 역사이다. 기껏해야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과 삼별초의 항전, 칭기즈칸의 유럽 정벌과 몰락정도로 기억하면서 심지어는 문화의 저속화로 역사에서 사라진 몽골문명을 폄훼하기까지 한다. 저자는 초원기마민족의 찬란한 문명을 스키타이문화를 통해 반박하고 당시 그들의 팍스몽골리나를 가능하게 했던 요인들을 면밀히 분석한다. 가령 그리스의 아고라나 로마의 포럼을 능가하는 몽골의 쿠릴타이(족장 회의)의 민주집중성과 엄격한 계율, 유목민들의 민첩성과 전투성, 어려운 자연환경에서 계승된 신의와 충성심 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답사 중에 만나는 그들의 순박함에 깊은 애정을 표한다.

 

정수일 교수는 간첩죄로 5년간의 수감생활 동안 세계 최초로 [이븐 바투타 여행기]라는 이슬람인 세계일주기와 [왕오천축국전]를 번역한다. 아울러 그의 아내에게 보낸 아름다운 옥중 서한 [소걸음으로 천리를 간다]를 펴내기도 한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뚜벅 뚜벅 역사의 진실을 향해 걸어가는 우직한 황소처럼 80 평생을 살아 온 그의 학문적 깊이와 열정이 계속된 감형과 사면으로 이어졌다. 분단의 희생양이 된 것은 아쉽지만 그의 가치를 뒤늦게나마 알아 준 것은 다행이다. 신영복님과 정수일 교수의 공통점은 오랜 수형생활 속에서도 전혀 마모되지 않은 사람에 대한 믿음과 순수함이다. 대명천지 자유롭게 만나는 관계보다 때로는 고립되고 격리된 시공간이 오히려 세상사 본질에 근접할 수 있다는 역설이 놀랍다. 아니 부끄럽다. 나는 사람을 믿는가?

 

2011. 7. 26.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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