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19노름마치-진옥섭

짱구쌤 2012. 12. 30. 18:15

 

 

 

흙이 쏘아올린 축포 ‘들꽃’

[노름마치, 진옥섭의 藝人名人 / 생각의 나무]

 

 

신유경님의 구음시나위를 들으며 이 글을 쓴다. 대학 때 집에서 형님이 듣던 김소희명창의 구음시나위는 오랫동안 귀에 감겼었는데 다시 듣는다. 장구장단에 순전히 입으로만 하는 시나위 가락은 그 어떤 장중한 관현악도 이를 수 없는 깊이와 애절함이 있다. 진옥섭의 [노름마치]를 읽고 듣게 된다.

 

‘노름마치’란 놀다의 놀음 ‘노름’과 마치다의 ‘마치’ 합성어로 최고의 연주자(잽이)를 일컫는 남사당패의 은어이다. 곧 그가 나와 한판 놀면 뒤에 누가 나서는 것이 무의미해 결국 판을 맺어야 했다. 이렇게 놀음을 마치게 하는 고수 중의 고수를 노름마치라 한다. 이 책에는 내노라 하지는 않았지만 평생을 예인으로 살았던 열여덟 명[노름마치] 명인에 대한 이야기다.

 

장금도, 1928년생이니 올해 84세. 군산이 고향인 춤의 명인이다. 열 두살에 권번(오늘날의 연예기획사)에 들어 삼십까지 호남제일의 춤꾼이자 예기로 이름을 날렸던 그녀는 열 살 먹은 아들이 어느날 “엄마 기생이야? 왜 환갑잔치에서 춤을 춰?”라는 말에 춤을 접는다. 인력거 두 대를 보내야만 청에 응했던 당대 최고의 무용수였던 그녀가 춤을 접고 춤끼를 숨기느라 멀미하며 살았던 인생이 눈물겹다. 이 책의 저자인 전통예술 연출가 진옥섭은 그녀의 옛 명성을 찾아가서 50년간 놓았던 춤을 다시 추자고 설득한다. “촌할매가 뭔 춤이다요?” 하던 그녀가 자식들 몰래 세탁소에 맡긴 한복 찾아 여행 다온다고 거짓말하고 서울에서 <여무, 하공에 그린 세월> 공연을 한다. 진옥섭의 공연 중계를 보자.

장금도의 [민살풀이춤]

무심한 침묵 속에서 소매의 포물선이 깊다. 살짝 돌아설 때 간결하게 비치는, 저 허공에 그린 세월, 오늘날 춤은 일자 소매로 제 몸을 스스로 들추지만, <민살풀이춤>은 관능의 가장 먼 쪽에서 시선을 당긴다. 춤은 ‘드러냄’이 아니라 ‘드러남’인 것이다.

오늘날 손수건을 들고 추는 살풀이춤에 비해 맨손으로 춘다하여 민살풀이 춤이라 부르는 그녀의 춤사위는 아쉽게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다.

며칠 전 읽은 [지식인의 서재]에서 진옥섭의 노름마치를 처음 알았다. 64년생이니 나와 그리 멀지 않은 세대인데 전통예술에 대한 애정과 박식에 놀라 집 앞 호수도서관에 마침 있는 그의 책을 빌려 서둘러 읽었다. 누구의 말처럼 그의 문장은 읽기가 아깝다. 어느덧 마지막 장을 읽을 때는 허전함이 밀려왔다. 그만큼 그의 문장은 진중하고 깊이가 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라는 명문으로 시작하는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고 절망했다. 글은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구나. 진옥섭은 글 한줄을 위해 전집 3권을 읽기도 하며 한문장을 넣기 위해 글 전체를 다시 쓰기도 한다. 이렇게 다듬어진 5년이 있었기에 [노름마치]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글은 아무렇게나 쓰는 것이 아니다. 그의 글중 한편을 다시 보자.

문장원의 입춤

첫 발짝을 떼는 춤이고 일생을 송두리째 바쳐 완성해가는 춤이다. 그의 입춤은 텅 비운 몸으로 나아가 여백과 만나는 한폭의 <새한도>다. 걷노라면 자연스레 밟히는 엇박은 관객의 허리를 곧추 세우고 남은 폐활량을 한데 모아 추임새를 뱉게 하니, 보라! 마지막 동래한량이다.

 

한창 우리 음악을 많이 들을 때가 있었다. 우연히 햇볕 좋은 날 영암에서 광주로 퇴근하던 차안에서 들은 안향련의 심청가 중 곽씨부인 숨거둔 대목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차를 세웠던 기억이 있다. 김소희 구음시나위, 박병천의 북춤에 전율을 느꼈었다. 그러다가 추임새와 흥이 사라지고 여기까지 왔다. 진옥섭, 그가 아니었으면 질기디 질긴 들꽃의 아름다움을 모른 체 6월을 보낼 뻔 했다. [판소리] CD를 주문한다. 진옥섭이 고맙다.

                                                                                                              2011. 6. 19.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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