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16나의문화유산답사기6-유홍준

짱구쌤 2012. 12. 30. 18:10

人生到處有上手(인생도처유상수)

[나의문화유산답사기6 / 유흥준 / 창비]

 

얼마나 많은 이들의 그의 답사기를 기다렸을까? 그에게 문화답사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 모두 그의 문화재청장 재직을 축하하였으되 한 가지, 한동안은 답사기를 볼 수 없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나도 그랬다. 1993년 벼락처럼 떨어진 [나의문화유산답사기-남도답사일번지 강진,해남]는 우리문화에게는 축복이었다. 지산유원지 유람이나, 경주 수학여행 수준의 문화재 관람을 답사 영역으로 올려 놓고 가히 인문학의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으니 ‘축복’도 과언이 아니다. 강진과 해남 어디를 가나 그의 책이 두 손에 들려 있는 답사객들을 흔치 않게 볼 수 있었으며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광경-관광지 술판 문화 대신 유적 앞에서 오래 대화를 나누는 듯한 진지한 탐미-을 일상적으로 만든 이도 그였다. 나 역시 문화재 해설판의 국보, 보물 몇호에만 관심을 쏟던 모습에서 문화유산의 뒤편까지 관심을 갖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 것도 그 덕분이다.

 

이번에 발행된 6권의 부제는 ‘인생도처유상수’다. 문화재 뿐 아니라 세상 곳곳에는 무수한 上手(나는 ‘프로’나 ‘꾼’으로 해석)가 있다는 삶의 철학이 들어 있다. 문화답사의 최고의 길잡이이자 문화재 행정의 정점에 까지 오른 이가 하는 말이라 더욱 그 의미가 새롭다. 이번 호에서는 궁궐문화의 복원 ‘경복궁’, 저자가 가장 많이 찾는 답사지 ‘선암사’, 영남 지역 ‘서원과 폐사지’ 등 14꼭지로 구성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에는 약간 비틀게 인식되었다가 점점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조선시대 궁궐문화에 대한 궁금증을 많이 해소시켜준 ‘경복궁’시리즈와 오랜 시간 머물렀던 서부권을 떠나 새롭게 둥지를 튼 순천에서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 줄지도 모를 ‘선암사’가 가장 눈에 띄었다.

 

지난 봄, 터키 여행에서 내 귀에 가장 거슬렸던 것은 “여기는 2천년 전에 이렇게 우람하고 정교한 건축물을 세웠는데 우리 것은 장난이네” 투의 자기 비하였다. 요즘 아이들 말로 하면 “어쩌라고?” 규모와 치장, 연대를 중시하는 사대주의적 문화관에 사로잡히지 않더라도 서구의 화려한 궁전과 고대 도시의 대규모 유적지를 보노라면 당연히 위축되고 부럽다. 저자는 그러한 답사관이 무지와 두려움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경복궁은 우리 옛사람들의 생각이 총체적으로 구현된 건축물이다. 이를 이해하고 나면 그의 오래된 명제 ‘아는 만큼 보인다’ 처럼 우리문화와 다른 문화가 제각각의 빛깔로 보일 것이라 기대한다. 예의 다른 나라 궁전들이 건축물의 완성도에 방점을 찍었다면 우리 건축물은 자연과의 조화를 중심으로 지어졌다. 경복궁을 둘러싼 여러 산들이 주는 포근함과 안정감이 그것이다. 자금성으로 대표되는 위압적인 궁궐문화와는 달리 1/20 규모의 경복궁은 위엄과 절제, 거기에 인간인 왕과 왕족들의 사적인 삶의 미학이 잘 스며있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 궁 도처에 있는 수많은 나무들이다. 자객을 막기 위해 일체의 나무를 심지 않은 자금성에 비해 경복궁의 나무는 수백년 간 건축물과 자연의 조화를 보여주는 우리만의 미학이다. 여기에 여염집 정원 같은 꽃담과 박석 바닥, 정감 있는 굴뚝 등 궁궐이 주는 위압감과 다른 인간미가 있다. 지난 겨울 창덕궁을 찾아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에서 궁궐은 섬과 같은 도피처다. 서울에 궁궐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삭막했을까?

 

다음은 선암사, 저자가 일 년에 꼭 한 차례 이상 찾아 쉬어간다는 선암사는 두세 번 가본 적이 있다. 절 치고는 참 특이한 점이 많았다. 우선 건물의 배치가 무척 복잡했고 무질서 했다는 점, 꽃나무, 특히 고목들이 많아 쉼터로서는 적당하다는 점, 태고종이라는 다소 이질적 교색 때문에 절보다는 사원 같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또 가끔 언론에서 나오는 각목 정파 싸움 등이 선암사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을 지배하곤 했다. 저자는 선암사의 건물 배치가 양반집 정원같이 아기자기한 점이 오히려 절집을 찾는 이에게 편안함을 준다고 했다. 또 곳곳에 숨겨진 풍경을 잘 찾아보면 선암사는 어느 절집보다 매력적인 곳이어서 매년 잊지 않고 찾아온다고 했다. 뭘 몰라서 지나친 선암사에 대한 미안함으로 주말에 선암사에 갔다. 입구의 홍교에서부터 천천히 살펴보고 가능한 많이 머무르며 둘러보았다. 비록 무우전 매화를 볼 수는 없었지만 녹음이 터널처럼 우거진 그곳에서 오랜만에 잘 쉬었다 왔다. 같이 간 집사람과 많은 이야기도 나누고 두고 온 우리의 절집 무위사를 대신할 위안처를 찾은 기쁨에 오졌다. 집에서 20여분 거리에 이렇듯 좋은 절집이 있어 다행이다. 유홍준에 고맙다.

 

나머지는 유홍준의 2촌5도 생활을 그린 부여 편이다. 2촌5도란 5일은 도시에서, 이틀은 시골에서 생활하는 자신의 일상을 표현한 말이다. 완전한 농촌 이주가 어려운 도시인들에게 이틀정도는 시골에서 생활하는 러시아의 한 정책을 보고 5년째 실천하고 있다한다. 부여에 작은 집을 짓고 살면서 그곳 사람들과 그곳 문화를 사랑하며 가꾸는 일상이 좋아보였다. 내가 나중에 시골생활을 한다고 하면 집사람은 꼭 “당신이? 풀도 잘 뽑지 않은 당신이 집을 짓고 살기엔 농촌은 너무 일이 많다.”는 핀잔에 늘 제대로 방어 한 번 하지 못했는데 이제 대안이 생겼으니 차차 연구해 볼 일이다.

 

폐사지의 미학, 영암사지, 왕흥사지는 다 폐사지를 말한다. 건물은 다 허물어지고 몇 개의 탑과 비석, 돌만 남은 쓸쓸한 절터, 전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이곳이 유홍준으로 인해 그 가치와 생명을 부여받는다. 말하지 않은 것과의 대화(아마 답사기 3편?), 사라져 버린 것에의 추억, 어디 폐사지 뿐이랴? 휑한 폐사지에 서서 그 처연한 슬픔이 내게로 달려드는 순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