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판문점의 협상가 정세현 회고록

짱구쌤 2020. 7. 25. 21:05

전문성과 리더십을 겸비한 사람은 그 하나뿐
[판문점의 협상가 / 정세현 / 창비]

DJ의 수첩
“정세현: 대북 전문가는 많지만 전문성과 리더십을 겸비한 사람은 그 하나뿐이다.”-DJ자서전
DJ의 수첩에 기록된 정세현의 인물평이다. 대단한 칭찬이 아닐 수 없다. 생전의 그가 강조한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모두 갖춘 사람이라는 말일게다. 그러했기에 전임 정권(YS)의 통일 비서관을 통일부 차관으로 발탁했고, 노무현 대통령도 그를 장관으로 유임시키는 이례적인 조치가 이루어졌다.
그러고 보면, 북한 핵 위기 등 남북 사이의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미국과 북한의 저의, 남한의 대응 등이 궁금할 때 제일 먼저 찾게 되는 전문가가 바로 정세현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면 흐릿했던 시야가 걷히고 예측 가능한 내일이 보이곤 하였다. 정세현을 최고의 남북 전문가로 신뢰하는 것이 나뿐 만은 아닌 듯하다. 소설가 황석영은 이 책의 추천사를 통해 “언제나 그에게 묻고 배운 나로서는 지난 세월 동안 그가 나의 벗이었음을 자랑으로 알고 있다.” 라고 했으며, 그가 이토록 깊은 통찰을 갖게 된 배경으로 동시대 사람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꼽았다. 이 회고록은 그런 사실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지도자의 철학 부재
대통령 탄핵과 구속이라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도 사실 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좀 짠하기도 했다. 불행한 가족사도 그렇고 개인 박근혜에 대한 연민이기도 했을 터이다. 하지만 교육을 포함한 통치행위의 그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무엇보다 그의 재임 시절 학교에 불어 닥친 ‘100대 교육과정’은 좀처럼 용서가 되지 않는다. 학교의 교육과정을 줄 세울 수 있다는 발상, 그런 페이퍼 평가를 통해 우수학교와 그렇지 못한 학교를 갈라 당근과 채찍을 휘두를 수 있다는 교육 철학의 부재, 그 후과는 상당 기간 학교에 남아 고스란히 교사들과 학생들에게 생채기를 보탰다.
정세현은 통일에 대한 지도자의 철학 부재를 한탄한다. 식민지를 경험한 분단국가의 지도자에게 남북문제는 교양이 아닌 필수 전공이어야 한다.
“어떤 우방도 민족보다 우선 할 수는 없습니다.” -YS 취임사
아마 3당 합당으로 크게 실망한 사람들이라 해도 YS의 이 취임사를 듣고는 상당히 설레였을 것이다. 이어진 최초의 정상회담 추진까지는.. 문제는 그 후, 김일성의 사망과 조문 파동을 거치며 급격히 보수적인 행보를 보이더니 급기야는 미·북 사이의 회담을 반대하기까지에 이른다. 북한 붕괴론에 빠져든 것이다. 깊은 통찰과 철학이 없으면 그야말로 갈짓자 행보로 귀결된다.
MB의 철학은 언급하기도 그렇다. ‘비핵·개방·3000’이라는 다분히 장사꾼적인 철학으로 금강산 관광을 중단시키고 통일부를 개점 휴업상태에 이르게 한다.
“통일은 대박!” –박근혜 광복절 축사
압권은 우주의 기운과 통일 대박을 외친 박근혜 정권이었다. 정세현이 두고 두고 아쉬워하는 것이 ‘개성공단 폐쇄’조치이다. 부침과 강약이 존재하는 남북관계에서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는데 그것을 넘어버린 조치가 개성공단 폐쇄이다. 개성공단은 단순히 남북 경협의 상징을 넘어 남북평화시대의 마중물이기도 하다. 외부에서 개성공단의 정상 가동여부가 한반도의 위기를 보는 척도로 인식하는 것은, 지정학적으로나, 인적 구성으로나 평화지대로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곳을 그냥 일체의 과정 없이 대통령 행정 명령으로 폐쇄해 버렸으니 쯧쯧. 철학이 부재하면서도 용감한 리더.
“남북관계의 발전은 북미관계 개선의 종속 변수가 아니다.” -문재인 8·15 기념사
이른바 ‘운전자론’의 연장선상이다. 북미회담을 주선하고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결행한 리더에게 정세현의 주문이 더해진다.
“금강산 관광 중단이나 개성공단 조업 중단은 행정명령에 불과하고 국무회의에서 결정된 거지, 유엔 제재와는 전혀 관계없어요.”(364쪽)

 

참모의 결기
조선 사람들이 원래 독종입니다. 제가 미국에 당부하고 싶은 말이 이겁니다. 이번 한일 관계만 봐도 그래요. 한국 사람들이 일본에 보여준 결기가 북한한테도 똑같이 있어서 그게 미국을 상대로 발휘되고 있는 셈이에요.(중략) 식민지 피지배 경험을 갖고 있는 약소국가 국민들이 민족주의에 내재된 저항성에 대한 인식을 미국이 갖지 않으면 북한과 내내 평행선을 달릴 거예요.(642쪽)
지도자의 철학을 뒷받침하고 견인하는 것은 참모들의 결기가 아닐까 싶다. 정세현은 리더에게도, 보수에도, 진보에도, 미국에도, 북한에도 당당하다. 자신의 분야에 대한 깊은 공부, 많은 경험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정세현이 대통령의 참모들에게 말한다. “저질러버리시죠.”라고 말하면 되는 문제인데 그걸 못하고 있으니...

 

통일의 미로 벗어나기
40년을 북한과 상대하며 남북문제에 천착해 온 그이기에 다음의 말은 무겁게 다가온다.
“그런데 40년 넘게 이 문제를 다루며 살다 보니까 사실 이게 무척 어려운 문제였던 거예요. 그야말로 ‘끝도 시작도 없이 아득한 통일의 미로’아니에요?”(647쪽)
우리를 둘러싼 외부 조건의 문제, 강대강으로 부딪히는 미·북 문제, 남한 내의 여론 등 살얼음판을 걷는 양 위태로웠던 남북문제가 아득한 미로처럼 어려웠을 것이다. 가까이에서 이를 지켜보며 1념 넘는 시간동안 열다섯 차례의 인터뷰를 통해 이 책을 정리한 훌륭한 인터뷰이 박인규가 나름의 해법을 제시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외부 환경의 변화와 관계없이 또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민족 내부의 협력과 교류, 신뢰 증진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하겠다는 그 자세다. 이 같은 태도와 행동이 쌓여갈 때 남북의 화해와 신뢰가 두터워지지 않을까? 통일의 구심력이 통일에 대한 원심력을 압도할 때 통일은 이뤄진다. 이는 통일에 관한 정 장관의 평소 지론이다.(중략) ‘통일의 미로’를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민족이 단결하는 것이다.(654쪽)
700쪽 가까운 회고록이 지겹지 않게 읽혀졌다. 평소 관심이 많았던 일이기도 했지만 직설적이면서도 유머러스란 정세현 장관의 스타일이 나하고 맞는 것 같았다. 전문성과 리더십을 겸비한 학자이자, 행정가인 그를 많이 닮고 싶다.
2020년 7월 25일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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