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짱구쌤 2018. 5. 7. 12:21

 

 

머리부터 꼬리까지 팥!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 마쓰이에 마사시 / 비채]

 

낯익은 미래, 일본

1996년 일본에 갔을 때 생소했던 것 두 가지. 애완동물숍과 편의점이었다. 마트 한쪽을 넓게 차지하고 있는 애용동물용품 코너에는 없는 게 없었다. 일행 중 한 명은 강아지 비스켓을 술안주로 사다 먹는 해프닝도 있었으니. 모든 가게가 문 닫은 저녁거리 곳곳에는 편의점만이 불빛을 내비치고 있었다.

2013년 일본에 갔을 때는 혼자 사는 사람들이었다. 편의점의 대부분은 독신자들을 위한 물건이 소량 포장되어 있고 혼자 사는 노인들과 늘어나는 빈집이 사회 이슈가 되고 있었다. 우리 사회가 도달할 모습이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중년의 이혼, 동거, 동성애가 낯설지 않았다.

 

명작은 디테일

작가의 전작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처럼 담백하고 여운이 남는 소설이다. ‘이혼을 했다.’로 시작하는 소설은 48살에 다시 독신이 된 다다시가 옛 애인 가나와 재회하고, 오래된 헌집을 마음껏 고쳐 쓰며 살아갈 우아한 시간이 예고되어 있다. 전작처럼 건축이 이야기의 중심을 관통한다. 다락방을 들이고 서가를 짜고 벽난로를 손질하는 일은 다다시가 가장 좋아하는 집고치기 놀이이다. 길냥이 후미를 기르며 가나와 만나는 일상은 그렇고 그런 이야기로 머무를 법도 한데, 오래된 집을 고쳐가는 세사한 디테일로 인해 몰입하게 된다. 유홍준이 일본축구협회장의 오래 된 가훈에 감명 받은 것처럼 일본인들은 그들 특유의 디테일이 강점인 듯하다. 전통 잉어빵을 가업으로 잇는 그 집의 가훈은 머리부터 꼬리까지 팥’.

 

악마도 디테일

지난 427일 판문점 회담의 백미는 도보다리 밀담이었다.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담론을 어떻게 이뤄낼 것인가와 함께 많은 이들의 관심(아니 걱정)은 적대적인 두 체제의 정상이 어떤 그림을 만들 것인가였다. 파란색 도보다리에서 나누는 무성영화 같은 장면은 모든 것을 기우로 돌리는 최고의 디테일이었다. 소박한 탁자를 두고 나누는 설득과 수긍의 대화는 역사적인 사변의 시작이 되기에 맞춤이었다. 디테일에 숨어 있을 것이라는 악마를 명작으로 바꾼 회담 기획자에(탁현민?) 찬사를 보낸다.

 

고기 한 점 빼지 마라!

50년 전통을 잇는 곰탕집 선대의 유훈은 고기 한 점 빼지 마라!’ 정직이나 성실 같은 큰 것 말고 고기 한 점을 이야기하는 그 집에 믿음이 간다. 미래사회와 글로벌을 이야기하는 그럴싸한 교육비전보다 아침 30분의 평화를 이야기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국적모를 신조어의 경연장이 되었던 [100대 교육과정]이 사라진 것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조금 더 쩨쩨하고 디테일한, 그래서 학교보다는 교실이, 더 나아가서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에 주목하는 교육을 하고 싶다.

이야기는 매우 현실적으로 마무리된다. 주인공의 우아한 생활이 오래 지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새로운 생활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201857일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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