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공터에서

짱구쌤 2017. 4. 30. 17:45

 

 

내 안에 갑질은 없는가?

[공터에서 / 김훈 / 해냄]

 

공터의 기억

국민학교 때 살았던 광주시 풍향동 늴리리 동네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기적처럼 남아있던 공터는 어릴 적 크기는 아니었지만 추억을 소환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책가방을 던져놓고 나온 공터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있었고, 구슬치기, 딱지치기, 자치기, 하루(손야구), 나이 먹기, 다방구, 얼음땡, 오징어, 해바라기, 삼팔선 등 헤아릴 수 없는 놀이가 펼쳐진 놀이동산이었다. 비가 올 때조차 팬티입고 비 맞기, 함정파기 등 연중무휴였으며 정보와 음식과 정이 오고가는 아고라이기도 했다. 교사가 된 지금 아이들에게 전하는 추억의 대부분은 이곳을 근거지로 삼고 있다. 나에게는, 누추했지만 크게 아쉬울 것 없던 시절의 기억이지만 작가 김훈의 공터는 조금 다르게 읽힌다. 의지와 상관없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기억, 아버지와 자신의 세대가 겹쳐지는 시대, 집과 집사이의 공터처럼 어디에도 속하지는 않아서 새로운 무엇이 들어서야 하는. 혹은 들어서지 않아야 하는.

 

소멸

작가는 이미 내재화된 개인들의 갑질이 사라져야 희망이 보인다고 말한다. 현대사의 수많은 갑질의 역사를 기록하고자 했으나 기력이 쇠하여 이만큼밖에 쓰지 못했단다. 다 써야지 소멸될 것 같았는데 다 쓰지 못했다면 앞으로도 무시로 대면할 기억들. 하지만 본래 기억이란 그런 것 아닌가? 씻김굿처럼 다 씻을 수 없는 그래서 남아있는.

아버지 마동수와 두 아들 마장세, 마차세가 살아온 1979년까지의 현대사를 훑는다. 일제말 만주, 전쟁 시기의 서울과 부산, 베트남 전쟁과 남태평양의 괌, 작가의 말처럼 우리들의 주인공들은 남루하다. 어느 것 하나 잘 풀릴 것이 없고 내세울 그 무엇이 뚜렷하지 않다. 이 비루한 삶들의 슬픔과 고통이 내내 책 속에서 도망 다닌다. 내 기억의 파편들과 만나기도 하고 아무 연관 없이 떠돌기도 했다. 마주할 때에는 고통스러웠지만 견디고 나니 비로소 새로운 힘이 생기는 느낌이었다.

스멀 스멀 기어 나오는 내안의 갑질은 없는지. 나이로, 지위로, 그것도 아니면 막무가내로 내뱉는 우격다짐으로. 두루 살필 일이 나이 값 하는 일이다.

 

김훈의 문체

'비가 내린다''비는 내린다'는 다른 느낌이지만 그 차이를 문법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다르다. 그런 걸 문장마다 하나하나 따지려면 진이 빠진다. 하지만 그런 노력 없이는 문체를 만들 수 없다. (김훈)

김훈의 대표작 [칼의 노래]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로 시작한다. 첫 문장을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사이에서 수많은 고민 끝에 썼다고 했다. 객관적 사실과 주관과 감정이 개입한 문장 사이에서 가장 적합한 문장을 찾아내기가 힘겹다고도 했다. 책 어느 쪽을 펴더라도 김훈의 것임을 대번에 알 수 있을 만큼 독보적이다. 기력이 쇠해지면서 글을 쓸 수 없었다고 한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흔들거림

그의 주인공들은 모두가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린다. 영웅들조차도 그렇다. 결전을 앞두고 식은땀 흘리며 밤을 지새우는 [칼의 노래]의 충무공이나, 두고 온 가족들이 그리워 눈물로 하세월인 [흑산]의 정약전도 예외가 없다. 그 흔들거림이 있어 우리는 그의 글을 신뢰한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영규. 예루살렘 입성기 중에서)

2017. 4. 30.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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