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리영희를 함께 읽다 / 고병권 외 / 창비]
우상과 이성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우리에게는 현실의 가려진 허위를 벗기는 이성의 빛과 공기가 필요하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가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괴로움 없이는 인간의 해방과 행복, 사회의 진보와 영광은 있을 수 없다.(우상과 이성)
우상의 광기를 걷어내기 위한 글쓰기와 실천으로 ‘사상의 은사’라는 영광과 투옥, 해직의 고통을 동시에 받아야 했다. 베트남전의 진실, 중국(공)에 대한 바른 이해, 남북 군사력의 객관적 비교, NLL에 대한 실체 등은 모두 ‘진실’을 추구하고자 했던 ‘자유인’의 실천이었다. 저자가 떠난 지 7년이 되는 오늘, 그를 다시 소환하는 것은 우리 시대가 여전히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우상들 때문일 것이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당신네들, 하늘을 나는 저 새를 보시오, 저 새가 오른쪽 날개로만 날고 있소? 왼쪽 날개가 있고, 그것이 오른쪽 날개만큼 크기 때문에 저렇게 멋있게 날 수 있는 것이오. (제시 잭슨)
참 멋진 말이다. 식민지, 분단의 역사로 근대화를 건너면서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갖게 된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이기도 하다. 지난 대선을 지켜보면서 ‘왜 우리는 품격 있는 보수가 없을까?’아쉬웠었다. 종북, 귀족노조, 전교조가 아니면 도대체 말을 이어가지 못한 체 허둥대던 모습은 ‘보수의 위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불행처럼 느껴졌다. 원칙과 지나온 가치를 지키는 보수, 역동성과 변화를 지향하는 진보는 박멸해야 할 적이 아니라 상호 보완해야 할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저자는 반공주의로 얼룩져 외눈박이가 되어가는 우리 사회에 양 날개의 균형을 끊임없이 보여준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
스핑크스의 코
2010년 리영희 선생, 2016년 신영복 선생의 갑작스런 부음은 조금씩 한쪽으로 기울어져가는 걸음에 목발이 되어주었던 ‘인생의 스승’을 잃었다는 상실감이 컸다. 나이 오십, 아직도 갈팡질팡하는 삶 때문에 스승의 부재가 더욱 아프지만 선생의 말처럼 더 좋아질 것을 믿는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2017년 5월 28일 이장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