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120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조양욱

짱구쌤 2013. 3. 16. 19:09

 

내가 졌다!

[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 조양욱 / nBook ]

 

얼마 전 정계은퇴 선언을 한 유시민의 말이다. 2002년 보권선거로 등원한 국회에서 흰바지에 케쥬얼 복장으로 선서를 해 이른바 “빽바지” 사건으로 우리 정치에 출연하여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 “유빠”, “자유주의 정치인”, “분열주의자”등 극과 극의 평가를 달리던 그가 개혁당, 민주당, 열린우리당, 국민참여당,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을 두루(?) 거쳐 마침내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은퇴한다고 선언했을 때 사실 난 좀 허전했고 약간 미안했다. 정당 개혁, 참여 민주주의 등의 시도가 마침내 실현되지 못한 체 “내가 졌다!”고 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라-도종환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정호승

동어 반복처럼 느껴지는 두 시인의 꽃 이야기는 참 좋아한 시어인데 제목으로 씌여 있고 믿을만한 기자의 추천도 있고 하여 쉬는 듯 읽은 책이다. 200페이지에 부담 없이 넘어가는 수필은 두껍고 머리 아픈 책들에 고문당한 요즘 내게는 꼭 필요한 책이었으니. 저자는 조선일보(억, 조선일보.. 느낌이) 기자 출신으로 국민일보(거기에 순복음교회의 그 신문까지) 도쿄특파원을 거친 일본통이다. 일본단파라디오방송이 주는 ‘아시아상’(그런 상도 있나)을 받았다니 어지간히 일본말은 잘하는 모양이다. 예산대로 책 대부분은 일본과 관계된 이야기다. 평소 같았으면 저자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절대 손대지 않았을 책일테지만 이제 나이도 들어가니 너그럽게(이말이 맞나?) 두루 이해하기로 하니 한결 수월하게 읽어진다.

 

저자가 좋아하는 음식점과 이발소, 인사동과 대학로,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과 관계된 추억, 감상 따위를 쓴 글이 앞을 차지하고 중반 이후는 일본 이야기다. 일본 특파원 시절 만난 사람 이야기는 그렇다 쳐도, 일본 잡지와 텔레비전에서 본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는 것은 좀 민망하다. 모두가 다 아는 ‘우동 한그릇’-여기서는 ‘메밀국수’-이 버젓이 실리고. 전여옥. 갑자기 생각나는 이름이다. 국회의원 전의 직업이 한국방송 도쿄 특파원이었을 때 “일본은 없다”가 공전의 히트를 치고 그 댓가로 국회의원이 되었는데 그 책이 재일교포 작가의 책을 그대로 베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여기까지는 있을 수도 있는 일이건만 전여옥은 그런 일 없다면 오히려 그 작가를 고발한다. 한참 후에 법원의 판결이 나서 작가의 억울함은 풀렸지만 아직까지 그녀가 사과했다는 보도는 본 적이 없다. 사실 일본은 너무 가까운 곳에 있는 나라라서 그곳의 문화나 취향은 곧바로 전해진다. 방송 프로그램, 노래, 책, 사업 등 전방위적이다. 손쉽게 아이템을 구하고 거리낌 없이 카피한다. “내가 졌다”

 

저자가 억울해 할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보기에는 그도 이 책을 그렇게 쓰고 있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요즘 개그로 말하면 “작가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이다. ‘글감옥’이라 하여 매일 매일 12시간 이상 책상머리에 앉아 고독한 싸움을 한다는 작가 조정래는 차치하고서라도 적어도 자신의 경험과 사유로 빈 원고지의 공포를 넘어서야 한다. 그러고 난 후에라야 돈을 주고 사서 읽는 이들에게 염치가 설 일이다. 이쯤되니 나 스스로에게도 묻는다. ‘너는 네 사유로 지금 글을 쓰는가?’ 글쎄요. 잘 안 풀릴 때마다 다행히 가까이 찾아갈 본(本) 하나가 있다. 벌교의 태백산맥 문학관에 가서 작가와 그 가족들이 썼다는 키높이 만큼의 원고지를 보고 오면 기껏 2쪽 짜리 감상문 앞에서 쩔쩔매는 쪼잔한 나를 간단히 넘어설 수 있다.(그런데 그것만 보고 오는데 갑자기 입장료가 생겨서..)

 

하지만 누구에게나 어떤 책에서나 가르침은 늘 있는 법. 이 책에서 가장 좋은 글귀를 만났다. 역시 자신의 경험은 아니고 어디서 보고나 들었을 이야기이지만, 뉴욕에서 구걸하는 한 걸인이 [나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라는 팻말로는 몇 푼밖에 벌지 못했으나 어떤 사람의 도움으로 문구를 바꾸자 만선(滿船)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어느 시인이 써준 팻말은 [나는 봄이 와도 꽃을 보지 못합니다] 내가 늘 안타까워하는 것이 이것이다. 구호와 선언, 주장만으로는 아무런 감동도 줄 수 없다. 카피라이터의 명문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글을 써보자는.. 피켓에, 교육과정에, 연구보고서 제목에, 아이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에...

 

다시 유시민으로 돌아가자. 난 유시민을 좋아했고 몇 년 전에 쓴 그의 책의 서평에서 차기 대통령으로 점찍는 대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그가 이후에 진보정당과 보여준 통합 때도, 결별할 때도 난 나름 이해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그의 팬이었다.(정치적으로는 아니다) 이제 그가 “내가 졌다”를 선언했다. 그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집필가로서의 삶이 성공할 수 있도록 기원해주는 것과 이 책의 저자가 제목을 쓰도록 하용해준 정호승의 싯귀를 들려주는 일이다.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 정호승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2013년 3월 16일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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