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117문명의 배꼽, 그리스-박경철

짱구쌤 2013. 2. 17. 18:44

 

내 삶을 선택할 권리는 나에게 있다!

[ 문명의 배꼽, 그리스 / 박경철 / 리더스북 ]

종일 그리스에 빠져 있다가 비가 내려 산책을 포기했다. 비 좀 온다고 방안을 서성이는 나 같은 사람에게 ‘내 삶에 가장 큰 은혜를 베푼 요소는 여행과 꿈’이라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고백은 오를 수 없는 산이다. 20대에 저자가 처음 책으로 만나 가슴에 새긴 꿈을 오십에 이르러서야 실현한 긴 여행의 기록이라는 이 책은, 내용과 형식을 떠나 그 무모한 용감함에 박수를 보내야 한다. molon labe. ‘와서 빼앗아보라.’ 스파르타를 상징하며 그리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티셔츠의 문구를 그에게 돌린다.

 

앞으로 총 10권의 책으로 쓸 계획인 그리스 여행기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와 비슷하다. 다만 일본인인 시오노가 로마에 살면서 로마인보다 더 로마를 잘 기록하여서 유명해 졌지만(그것이 로마인 이야기를 읽는 내내 불편하기도 했다) 박경철의 그리스 이야기는 동양의 한 중년의 사내가 늘 흠모하던 한 사람(니코스 카잔차키스)을 길잡이 삼아 이방인의 눈으로 인간의 역사를 살피려는 차이가 존재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 처음 알았다. 그의 묘비명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그가 평생 써낸 저작과 자서전을 두루 섭렵하고 카잔차키스의 여정에 따라 시골의사 박경철이 그리스를 여행한다. 그가 만난 그리스인, 고대의 유적과 유물들, 그리고 그리스는 이미 카잔차키스의 눈으로 기록되어 있고 여기에 동양인 박경철이 말을 거는 형식이다. 아테네 대학을 다니던 5년을 제외하고 평생을 여행하며 살았던 그의 글은 깊은 사유가 통찰력이 있다. 여기에 국민 멘토라는 닉네임을 가질 정도로 다방면에 걸쳐 두루 박식한 시골의사가 만났으니 술잔 넘어가듯 책장도 술술 넘어간다. 다만 복잡한 그리스 신화의 여러 이야기들과 그리스 희비극을 거의 알지 못한 관계로 좀 더 생생하게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박경철은 그리스의 속살을 보고자 했다. 서양 문명의 근원인 그리스가 유로화 위기의 진앙지로 몰리며 유럽의 천덕꾸러기가 되어가는 과정을 안타까워했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보여준 그리스인 특유의 낙천성과 남성성이 점차 거세당해가는 것에 대해 누구보다 아파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라고 말한다. 어느 한가지로 국가와 민족, 문화를 규정짓고 설명하는 것의 폭력성을 배제하면 비로소 속살이 보일 것이다. 하여 경제 위기를 불러 온 공격적인 유럽 자본들, 부패하고 무능한 관료와 지도층에 대한 비판을 넘어 한때 그리스 경제 한축을 담당했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증오가 터져 나오는 것이 당황스럽다. 전성기를 지나 쇠락해가는 문화만큼 움츠려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여전히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융합시켜 서구문화의 배꼽을 자임했던 자부심과 아량을 확인하는 것이 못내 반갑다.

 

평생 약사로 일하다 은퇴 후 연금으로 살던 한 노인이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에서 권총으로 자신을 쏘았다. 그리스 경제위기로 연금이 삭감되던 것에 항의한 그의 유서는 그리스를 술렁거리게 하였다.

“나는 조국을 믿고 성실하게 일하며 연금을 납부했다. 하지만 조국은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내게 이런 조국을 선택할 권리는 없다. 하지만 내 삶을 선택할 권리는 나에게 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결기다. 땅을 딛고 사는 자들의 표상, 조르바의 함성이다. 박경철은 그리스 문명의 관문인 펠로폰네소스를 여행의 출발지로 삼았다. 고대 그리스 문명의 원형질인 코린토스, 고대 올림픽의 산실 올림피아, 역사상 가장 강력한 공동체 스파르타를 차례로 여행하여 그리스를 만난다. 어느 곳에서도 그 옛날 세상을 호령하던 희랍인들의 기상은 없다. 가파른 절벽에 지워진 수도원에서의 호의, 허름한 술집에서 만난 촌로들의 가식 없는 베풂이 위안이다.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에서 배교도로 내쳐진 카잔차키스는 하지만 이렇게 일갈한다.

“저들과 나의 차이는 이런 것이라네. 저들은 구원의 길을 찾았다고 믿으며, 그것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지. 하지만 나는 도리어 그러한 구원의 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다네.”

그토록 사랑한 조국 그리스가 오늘날 처한 현실을 본다면 아마 이렇게 이야기 할 것이다.

“진정한 구원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 법이라네. 모두가 강가에서 발을 동동 구를 때, 누군가는 그 강에 다리는 놓지. 나머지 사람들이 그 다리를 건너며 ‘구원’이라고 말하지만 ‘진정한 구원은 바로 그 구원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이거든.”

 

박경철의 시험은 일단 성공한 듯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그리스를 사랑한 길잡이와 함께 떠났으며, 자신도 안락한 호텔방과 친절한 가이드의 유혹을 뿌리치고 지금도 렌터카에 몸을 싣고 그리스의 속살을 보여주려는 노력을 멈출 것 같지 않으니 말이다. 이제 나만 잘하면 된다. molon labe. ‘와서 빼앗아보라.’

117문명의 배꼽 그리스.hwp

2013년 2월 17일 이장규

117문명의 배꼽 그리스.hwp
0.09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