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65흑산-김훈

짱구쌤 2012. 12. 31. 09:24

 

누구도 삶을 단념할 수는 없다

[ 흑산(黑山) / 김훈 / 학고재 ]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칼의 노래]의 첫 문장. ‘한국 문단에 떨어진 벼락같은 축복’이라는 찬사 속에 등장한 김훈의 소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처럼 아득하다. 말과 글로써 정의를 다투지 않을 것이며 다만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을 이야기 할뿐이라는 저자의 말은 이번 작품에서도 그대로 관통한다.

신유박해 등 천주교 신자에 가해지는 모진 박해 속에서 흑산도로 유배 간 정약전과 그의 처조카사위 황사영을 한 축으로, 순교하거나 배교한 20여명의 다양한 인간군들을 다른 축으로 하여 이야기는 펼쳐진다. 궁녀 길갈녀, 마부 마노리, 상인 강사녀, 포졸 박차돌, 노비 육손이, 옹기쟁이 김개동, 선비 정약현, 섬과부 순매, 섬총각 창대, 뱃사람 문풍세 등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 제각각 살아서 시대를 증언한다. 그중 작가는 마부 마노리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마노리는 천주교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왜 금기시 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것들을 쉬쉬하며 귓속말로 전하는 이들에게 “선비들이란 그렇게 뻔한 것도 공력을 들여서 이해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자전거 타는 작가 김훈의 말은 간결하면서도 깊다. 아니 간결하니 깊다. 그가 이순신의 그 한 없은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해 이야기 할 때처럼 군더더기나 도식이 없다.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고 애둘러서 치고 빠지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나는 그의 문장이 여전히 낯설고도 부럽다. 주간지 시사저널의 편집장이었으면서 라이벌인 한겨레21의 인터뷰에 응하여 자신의 회사를 폄하하다 스스로 사직한 그의 이력이나, 나중에 한겨레신문의 사회부 평기자로 특채되어 사람들의 민낯을 소상히 전해주는 기사를 읽으며 그의 품성을 어렴풋이 엿보았다. 조직되지 않고, 갇혀있지 않으며 머무르지 않는.

흑산으로 유배 가서 黑山이 주는 절망과 막막함(그의 표현대로 격절함)이 싫어 그냥 흐리면서 아득한 자산(玆山)으로 바꾸는 정약전 옆에는 섬을 떠나본 적 없는 섬총각 창대가 있다. 창대는 [소학]에서 무엇을 배웠냐는 약전의 질문에 “[소학]의 가르침은 물 뿌려서 마당 쓸고 부르면 응답하는 것” 이라 답한다. 간결하고 분명하다.

“새로운 삶을 증언하면서 죽임을 당한 자들이나 돌아서서 현세의 자리로 돌아온 자들이나, 누구도 삶을 단념할 수는 없다.”

방학을 했다.

2011. 12. 23.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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