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동무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짱구쌤 2024. 1. 21. 17:04

 

 

EPL 검은 점퍼 아저씨들

늘 궁금했었다. 박지성이 뛰던 맨유의 스타디움에서도, 지금 손흥민의 토트넘 경기장에서도 관중들은 하나같이 검은색 점퍼를 입고 서서 응원하는 아저씨들 일색이다. 무언가에 화난듯한 표정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90분 내내 열광하는 배 나온 아저씨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일말의 궁금증은 이 책에서 해소되었으니 그들은 바로 베이비부머 노동계급이다. EU 탈퇴를 내건 브렉시트를 주도한 이들로, 한때는 복지사회 영국을 떠받치는 주역으로 칭송받다가 어느 순간 이민자를 거부하고 국뽕을 추앙하며 영국 미래세대의 발목을 잡는 꼰대들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있다. 그런 억울함과 분노를 축구경기장과 펍에서 풀 수 밖에 없는 가련한 동년배들이다. 저자는 이들 중 한 명과 결혼한 일본인이다. 저자는 남편과 그의 친구들인 이 오랜 노동계급을 지켜보면서, 이렇게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까지 몰린 이들도 사실 뒤틀어진 사회와 정치에 휘둘린 희생자들이며 각자 고유한 개인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뭉툭 그려진 노동계급을 하나씩 개인으로 그리고자 애쓴 흔적들이 보인다. 그것도 매우 유쾌하게 말이다. 노동계급들에겐 행운이다.

 

NHS와 유리멘탈

등장인물 대부분은 50년대 후반에 태어난 60대 아저씨들이다. 두 명의 이질적인 인물이 등장하는데 글쓴이인 50대 일본 여성, 그리고 젊은 베트남 이주여성이다. 최소 30년 이상은 벗으로 지낸 이들이기에 치기 어린 젊은 날의 멋짐과 찌질함에서 지급의 무기력하거나 무모한 고집들도 전혀 단절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브렉시트를 결정하는 투표에서 이들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가짜 뉴스에 속아서 투표한 수가 상당 있었다는 것이다. 대처수상에서 시작한 영국의 신자유주의 파고 속에서 점차 축소되어지는 각종 복지정책에 일말의 돌파구로 브랙시트를 선택했다는 이들이 대표적이다. EU분담금을 복지정책(국가보건시스템인 NHS나 공공도서관 등)에 쏟아 부을 수 있다는 거짓 뉴스에 쉽게 넘어간 것을 두고 두고 후회한다. 사이먼은 영국 선술집에서 흔히 볼 수 있을 것 같은 마초 스타일의 아저씨다. 그는 외모와 달리 도서관을 사랑하는데, 축소를 넘어 거의 폐지된 마을 공공도서관을 대신하여 어린이 도서대여센터(거의 구멍가게)를 근거지로 도서 대출이나 신간 보유 투쟁을 계속한다. 가죽점퍼를 입은 마초가 어린이 도서관에서 매일 책 읽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씁쓸하면서도 웃음이 나온다. 지은이 남편의 과도한 국가보건의료시스템(NHS) 사랑도 웃프다. 영국이 자랑하는 NHS는 긴축재정으로 인해 가장 많은 타격을 입은 분야다. 거의 모든 의료 행위가 무료였던 시절에 비해(그래서 미국의 의료시스템을 경멸하였던 그들이었다) 지금은 시스템이 헐거워지면서 민영화에 힘겹게 맞사고 있다. 남편은 두통이 심하지만 CTMRI 검사 비용이 터무니없이 비싼 프라이빗(일반 병원)을 이용할 생각이 전혀 없다. NHS를 통하자니 몇 개월의 대기 시간과 절차를 견뎌야 하지만 그의 신념은 변함이 없다.

 

안디 무지크,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4시가 되면 학교는 하교와 퇴근 시간으로 접어든다. 교장실에서 숨죽였던 나의 음악 사랑도 이를 기점으로 발현되는데 우선, 에듀버스 정류장에 음악방송을 트는 것이 그것이다. 클래식FM라디오는 4시가 되면 노래의 날개위에가 흘러나오고 난 그중에서도 440분 경에 시작되는 안디 무지크를 사랑한다. 성우 뺨치는 진행자의 목소리는 서양 성악곡의 서사와 가사를 읽는데 음악에게라는 뜻의 안디 무지크는 언제나 멋지다. 그날 무슨 일을 겪었어도 4시부터 시작하는 이 음악의 향연을 거쳐 6[세상의 모든 음악]의 오프닝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를 들으면 모든 것이 눈 녹듯이 침잠한다. 음악의 힘이다. 이 책의 저자는 브릭팝과 록음악을 사랑한다. 그래서 모든 글의 제목은 전부 이들 곡에서 유래한다. 남편 동료들과 이웃들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EU탈퇴 블렉시트 상황에서도, 오랜 벗들이 하나씩 세상을 떠나갈 때도, 그 기고만장했던 노동계급들이 나약한 노인네로 비춰질 때도 그녀는 음악을 듣고 시간을 견딘다. 이민자를 더 이상 받지 말라는 그들이지만 이미 들어온 이민자의 복지를 박탈하거나 차별하는 행위는 참지 못하는 노동계급의 영웅들은 지금 혼란스럽다. 어디 그들 뿐이랴. 혼란스러운 사람들이.

2024121일 이장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