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79클래식 시대를 읽다-정윤수

짱구쌤 2012. 12. 31. 09:59

 

 

나는 또 들을 것이다

[ 클래식 시대를 읽다 / 정윤수 / 너머북스 ]

클래식 음악에 관한 두 가지 장면.

[#1] 내가 다닌 공립 고등학교는 3학년 때도 음악을 배운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같은 음악 선생님께 지도를 받았는데 베토벤 머리를 한 그 선생님은 무식한 고3 남학생들에게 나름의 교양이라도 심어야겠다는 일념에 불탄 분이셨다. 음악 감상 평가를 앞둔 1학기말 쯤 스무 곡의 클래식 명곡을 줄기차게 들려주시고는 이내 한 장의 테이프를 소개하였는데 [Hooked on classics]이 그것이다. 나는 충장로 레코드 가게에서 그 테이프를 사서 줄이 늘어지도록 들었는데 실기 평가를 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좋아서였다. 그 테이프는 일종의 클래식 하이라이트 버전인데 명곡의 익숙한 부분만을 발췌해서 청소년을 위한 편집을 마친 것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영국의 로얄 필하모닉에서 녹음한 전5집 메들리였다. 차이콥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부터 거쉰, 모차르트, 베토벤, 시벨리우스, 바하, 헨델, 비제를 거쳐 다시 1812년 서곡으로 끝나는 디스코풍 편집본이다. 하여간 나는 그때 처음으로 클래식이 그리 따분한 음악이 아니라는 편견에서는 벗어났지만 그때 잘못된 맛을 들인 관계로 진지한 클래식에 대해서는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 것도 그 음반 덕이다. 그래도 선생님, 감사합니다.

[#2] 하여 난 오랜 세월이 지나 1992년 완도 섬마을에서 갑자기 필에 꽂혀 그 먼 곳을 방문한 잡상인(?)에게 클래식 테이프 전집을 구입하였는데, 사실은 대학 1학년 때 보성 웅치 촌학교로 찾아간 어느 선배 사택에 벽 가득히 꽂혀있는 책과 음반에 감동받고 주눅 든 결과이기도 하지만, 하여간 수업을 마치고 홀로 들어선 사택 작은 방에서 난 그 험난한 클래식의 산을 넘겠노라 결심하고 테이프를 오디오로(광주 집에서 들고 간) 듣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음질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그보다는 너무 지루한 음악 때문이었다. 익히 알고 있던 음악가를 찾아서 선별적으로 들었건만 그 역시 산이었다. 익숙한 부분은 순간이었고 나머지는 첩첩산중이었다. 나중에 그 테이프는 죄다 아이들에게 건전 가요를 녹음해주는 훌륭한 자료가 되었으니 꼭 버린 것만은 아니다. [훅크드 온 크래식]의 여파라고 위안한다.

그런 쓰라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산 것은 순전히 저자 정윤수 때문이다. 전에 저자의 추천을 받아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읽으며 내내 머리를 쥐어짜던 기억을 벌써 잊고 무모하게 도전에 나선 것은 [인공낙원]에서 보여준 그의 박학다식과 바른 시각이 좋아서였다. 고졸에 불과한 그가 어느 교수보다 넓고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 것은 닥치는 대로 읽는 독서편력 때문이다. (소설가 장정일처럼)

저자는 무모하게 클래식의 전 역사를 다룬다. 바로크 음악의 선구자 비발디에서 시작하여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바그너, 차이콥스키, 시벨리우스, 드뷔시, 말러, 신고전주의 쇼스타코비치까지.. 숨이 차다. 수없이 등장하는 음악용어, 작곡가의 시대를 아우르는 폭 넓은 예술과 철학 사조, 그리고 작품들에서는 완전히 주눅이 들었지만(책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고 아무렇게나 쓰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 책은 클래식 음악과 작곡가를 소개하는 책이지만 근현대 서양사를 관통한다. 음악가의 작품을 이야기하고 감상함에 있어 고전주의네, 낭만주의네, 분리주의네 하는 작은 틀로 가두려는 시도에 단호히 반대하는 저자는 그 시대에서 선택한 작곡가의 입장을 존중한다. 한때 유행했던 내재적 발전론의 시각일 수도 있으나 난 그 인간적인 시각이 좋다. 책에는 밑줄과 접힘이 즐비하다. 모르는 것 투성이다. 두고 두고 들으며 살필 일이고.

다행히 때맞춰 무식한 동생을 위해 광주 사는 형이 클래식 파일을 잔뜩 보내주어서 작곡가에 맞춰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었다. 다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어렴풋이 공감하였다. 무슨 토플이나 해법 수학 도전하듯이 클래식을 대하는 나의 조급함이 없어진다면 나에게 맞는 음악을 찾아본 생각이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그래서 우선 저자가 추천하는 말러의 교향곡 2(부활) DVD를 주문했다.

난 그 공립고등학교를 나온 것에 감사한다. 지역 사회를 주름잡는 옛 동문들의 인맥이나 하찮은 명문의식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고 고3때도 음악과 미술, 심지어는 농구 응원을 위해 3번이나 상경을 가능케 해준 숨쉬는 교육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줍잖게 이곳 저곳을 기웃거릴 수 있던 것도 공교육의 힘이라 난 믿는다.

2012. 7. 28.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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