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78철학콘서트3-황광우

짱구쌤 2012. 12. 31. 09:57

 

 

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들

[ 철학콘서트3 / 황광우 / 웅진 ]

 

독후감을 쓰는 단 한 가지 이유, 기억을 못하니까!

컴퓨터 독후감 파일을 보니 철학콘서트1을 작년 3월에 읽었고, 2편은 작년 여름방학 때 읽었는데 도대체 무슨 내용이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만 저자 황광우에 대한 몇 가지 기억만 남아 있으니 다시 3편 독후감을 써서 망각을 보충할 수 밖에.

 

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들은 불교의 [금강경]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저자가 쓴 책 제목이기도 하다. 강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기 위해 풀과 나뭇가지를 엮어 애써 만든 뗏목을 유용하게 쓴 어떤 사람이 강을 건너고 나서도 그 뗏목이 아까워서 머리에 이고 다닌다는 내용이다. 뗏목은 방편이다. 싯다르타는 삶의 고뇌를 이기고 피안에 이르는 진리를 법으로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그 법이 좋다고 머리에 이고 지고 가는 사람이 있다. 이론은 우리를 진리로 안내하는 도구일 뿐이다. 하여 괴테는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직 푸르른 것은 저 영원한 생명의 나무라고 하지 않았을까? 싯다르타는 관념적이고 현학적인 철학자들의 말장난을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죽은 뒤에 삶은 존재하는 것이냐고 묻는 제자에게 그것은 내가 설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괴로움을 설하고 괴로움의 소멸을 행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설한다.”고 했다.

 

인간의 길을 이야기했으되 정작 자신은 제자들과 함께 상갓집 개가 되어 세상을 떠돈 공자를 사람들은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이상의 실천을 포기하지 않은 이라 칭했다. 이 책에서는 공자처럼 삶의 의미를 묻는 10명의 위대한 스승들이 우리에게 하고픈 말을 풀어 쓴 철학의 향연이다. 오디세우스를 쓴 호메로스와 철학자 소크라테스, 로마의 철인 키케로, 동양의 공자와 장자, 칸트와 니체, 도스토옙스키, 그리고 싯다르타.. 이름 자체로 주눅이 들고 하품이 나올법한(나에게는) 인물들이다.

 

장자를 이야기하면서 저자는 자신의 나이 이야기를 한다. 학생운동을 거쳐 노동운동, 진보정당운동 등 파란 만장했던(내가 보기에는) 저자가 아이 오십에 이르러 나이 오십은 시대에 책임을 져야할 나이지 시대를 개탄할 나이는 아니다 라고 말한다. 지난날의 삶이 의밍 있었고 후회되지는 않으나 이제는 공부하며 차분히 살고 싶다고 말한다. 체제를 비판할 수는 있지만 체제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기란 실로 쉬운 일이 아이다. 장자는 가죽나무 이야기에서 쓸모없음의 유익함을 설파했다. 볼품없는 겉모습 때문에 벌목당하지 않고 온전히 생을 누려 사람들에게 그늘과 열매와 쉼터를 준 거죽나무. [장자]를 사 놓고 아직 책장도 넘기지 않았는데 인용된 그의 글을 보면 그는 사상가 이전에 뛰어난 문필가다. 그가 쓴 바람에 대한 글도 일품이지만 다음의 푸줏간이야기는 정말 좋다. 최고의 요리사 포정이 소를 잡아 고기를 손질하는 모습이 하도 감탄스러워 그 비결을 묻자, 포정이 답한다.

저는 다만 도를 귀하게 생각할 뿐이옵니다. 도는 재주를 넘어선 것이지요. 제가 처음에 소를 잡았을 때에는 보이는 것이 소의 모습뿐이었습니다. 지금은 소를 마음으로 대할 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눈으로 보지 않으니 마음이 가는대로 칼을 움직입니다. 원래 생긴 그대로의 고깃결을 따라 고기 사이의 틈바귀가 있으면 거기에 칼을 밀어 넣습니다. 이렇게 칼을 댈 뿐, 무리하게 소의 살이나 뼈에 댄 적이 없었지요. 뼈마디에는 틈새가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새에 넣으니 널찍하여 칼이 여유롭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살과 뼈가 엉킨 곳은 저도 어려워 두렵습니다. 그런 곳은 집중하여 천천히 손을 움직여서 미묘하게 칼질을 합니다. 그러면 뼈와 살이 툭 하고 갈라지는데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와 같습니다. 칼을 들고 일어서 사방을 둘러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흐뭇한 마음으로 칼을 닦고 갈무리를 하지요.

 

평생을 독일 변두리 작은 도시에 살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산 칸트는 철학의 혁명가이다. 그는 인간 이성의 여러 혼란을 초래한 것은 진리의 독점적 소유자였던 철학자들의 오만과 독선이라 규정하고 이러한 혼란을 겪지 않기 위해 이성을 감시하고 감독하는 하나의 재판소를 설립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재판소는 정당한 요구를 하는 이성은 보호하고, 부당한 요구를 일삼는 이성에게는 응징을 가하는 법정이다. 이 재판소가 바로 순수이성의 비판이다. 철학자 칸트의 두 가지 어록이 인상적이다. “결혼은 생식기의 상호적 사용을 두 사람의 동의”, “철학을 배우지 말고 철학하는 법을 배우시오.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시오. 자기의 두발로 서시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칸트의 결혼관을 엿볼 수 있으나 그 자신의 말로 한다면 종합적 사유의 결과로는 참 거시기하다. 하지만 나는 칸트가 쓴 루소의 [에밀] 독후감처럼 쓰고 싶다.

나는 학자다. 나는 지식을 갈망하고 지식을 심화시키길 열망하며 지식에서 진보를 이룰 때마다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는 학자였다. 나는 지식만이 인간의 자랑이라고 생각했으며 무지한 민중을 경멸했다. 이런 나의 잘못을 바로 잡아준 이가 루소다. 루소를 만난 후 눈을 내리뜨던 나의 오만은 사라지고 모든 인간을 존경하게 되었다. 나는 평범한 노동자보다 훨씬 부끄러운 인간이었다.

 

저자는 삶의 방편인 이론을 신주단주인양 부여잡고 사는 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마땅히 짊어져야할 십자가를 뗏목으로 혼동해 쉬이 내려놓는 사람들의 염치이다. 내가 읽은 이 책의 키워드는 뗏목십자가

2012. 7. 21.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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