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신영복 함께 읽기

짱구쌤 2016. 2. 20. 10:50

 

우선 삶의 터전에 든든히 뿌리를 내리게

[신영복 함께 읽기 / 강준만 외 / 돌베개]

 

세상을 바꾸고 싶은가?

어린 나이에 정말 대견한 생각을 했네.

그렇다면 우선 삶의 터전에 든든히 뿌리를 내리게.

지금 자네 삶의 터전은 바로 이 담장 안일세.

어서 이 감옥에 뿌리를 내리게.

피 끓은 청년학도는 옥에서 만난 대선배에게서 변혁운동의 해답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것은 일상에 대한 충실함이었다. 나도 세상을 바꾸고 싶다. 보다 인간적이고 따뜻한. 그러면서도 수시로 망각하는 것은 지금, 여기. 내 삶의 터전은 학교이며 그 학교에서 깊이 뿌리 내리고 사는 것이 운동의 시작이다.

 

비록 가을 들판에서만이 아니라, 우리는 삶의 어느 터전에 처한다 하더라도 자기 몫의 일에 대하여 이웃의 힘겨운 일들에 대하여 결코 무력하거나 무심하지 않도록 자신의 역량과 심정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간만에 학교 목공실을 만드는 일에 힘을 썼더니 몸 이곳저곳이 삐걱거린다. 그래도 우리 힘으로 만든 조촐한 노동의 결과는 그 무엇과 비할 바가 아니다. 몸을 부리고 땀을 흘리는 일에, 그 일로 힘겨워하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의 힘을 키워나가야 한다. 우리 학교가 지향하는 삶의 힘과 지혜를 길러야 한다.

 

몸 가까이 있는 잡다한 현실을 그 내적 연관에 따라 올바로 이론화해내는 역량은 역시 책 속에서는 적은 분량밖에 얻을 수 없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독서가 남의 사고를 반복하는 낭비일 뿐이라는 극언을 수긍할 수야 없지만, 대신 책과 책을 쓰는 모든 창백한 손들의 한계와 파당성은 수시로 상기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일주일에 한 권 정도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을 근 5년째 하고 있다. 사고하고 돌아보는 일에는 기여한바 분명하나 창백한 손들의 한계에서 자유로운지는 확신할 수 없다. 조금 덜 읽더라도 일 속에서, 관계 속에서 지혜와 힘을 얻어야 한다. 남을 판단하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어설픈 먹물근성을 많이 빼야한다.

 

언젠가 먼 훗날 나는 서오릉으로 봄철의 외로운 산책을 하고 싶다. 맑은 진달래 한 송이 가슴에 붙이고 천천히 걸어갔다가 천천히 걸어오고 싶다.

선생은 [청구회의 추억]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사형이라는 극도의 두려움 속에서 퍼 올린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으며 무언가에 쫓겨 진짜 중요한 일들을 수없이 놓치며 사는 일상을 떠올렸다. 돌이켜보면 가장 좋았던 기억은 부잡스럽지 않고 잔잔하다.

 

우리는 어차피 누군가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스승이기도 합니다. 이 배우고 가르치는 이른바 사제의 연쇄를 더듬어 확인하는 일이 곧 자신을 정확하게 통찰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가르치던 아이들을 졸업 시키면 허전함에 한동안 멍하다. ‘시원 섭섭이 가장 적당한 말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가르치면서도 수없이 배운 관계들과 이별이 아쉬워서 일 것이다. 제자이지만 누구보다 훌륭한 스승이기도 했던 아이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옳게 파악되지 못하고 말초감각에 의해 그릇되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증오의 감정과 대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혐오에 있습니다.

여름 징역살이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도 참 많이 사람들을 미워한다. 세계관의 다름부터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편엽함까지, 우리가 사람들을 재단하고 미워하는 이유는 제각각이다. 남이야기하기 좋아하고, 쉽게 깎아내리고, 평가하는 못된(슬픈) 언행과 이별해야한다. 반백년 가까이 살면서도 청산하지 못한 부끄러움이다.

 

꽃은 최후가 아니라 씨를 만드는 하나의 과정, 무수한 과정의 연속으로 봐야 한다. 사회 변화 쉽지 않다. 다만, 변화시키기 위한 부단한 노력,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인간적이고 아름답고 보람 있다면 그 자체로서 훌륭한 사회. 어디에 있던지 꽃을 피우기보다는, 곳곳에 씨를 묻는 노력들을 같이 해나가야 한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아이들의 삶을 통째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오만했던 때도 있었다. 다행인 것은 이제는 그 과정을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는 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선생의 책을 통해 얻은 가르침이다.

2016220일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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