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8926년-강물

짱구쌤 2012. 12. 31. 10:15

 

 

32년이 흘렀다!

[ 26년 / 강풀 / 문학세계사 ]

너무도 복잡했던 금요일 하루가 지났다. 어제부터 내내 머리 무거웠던 오늘은 전체어린이총회인 [다모임]이 있었고 뒤이어 프로젝트 학습의 일환인 논에 허수아비 세우기, 오후에는 전교조 전남지부 집행위 회의, 방과 후에는 순천시내에서 교육공약 100만 서명운동을 치렀다. 결국 집행위 회의에는 불참하는 것으로 나름 타협안을 세워 분전했지만 바쁜 몸과 마음에 잔뜩 배달되어 온 책을 잡기에는 무리였다.

 

며칠 전부터 거실을 뒹굴던 만화책에 손이 갔다. 무심코 지나쳤는데 첫째 녀석이 친구한테 빌려와서 둘째 꼬마까지 읽은 그 책이 바로 ‘26년’ 이다. 단숨에 모처럼 편안하게 3권까지 읽어 내리는데 둘째 녀석이 신기한 듯 한마디 한다. “아빠 만화 보는 것 처음이네. 그런데 그 책 사실이야!”, “뭐가?”, “5월 18일 광주에서 벌어진 일 말이야.” “응” 한참을 골똘이 생각하다. “근데 왜 할머니나 아빠는 안 죽었어? 가만히 방 안에 있었구나.” “.....”

 

아들 녀석에게는 도무지 믿기지 않은 그 일이 있을 당시 나는 광주에서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휴교령이 내려 10여일 정도 집에서 쉬었는데 처음에는 쉬는 것이 좋았지만 점점 불안하고 무서워진 기간이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형이 집에 들어오지 않아서, 형을 찾으러 간 아버지 걱정에, 문을 걸어 닫고 이따끔씩 들리는 총소리에, 그리고 생전 처음 본 죽음에... 이따금씩 무등경기장으로 엄마 몰래 친구들과 걸어 나가면 도로를 달리던 형들이 던져주는 카스테라빵은 참 맛있었고 친구들끼리 ‘카더라’통신을 부풀리며 나오지 않은 텔레비전을 대체했다. 다음해에 대학에 들어간 형은 당연히 투사가 되었고 한참 후에 입학한 나도 자연스레 ‘운동권’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32년이 흘렀다. 우리 때면 누구나 그렇듯 망월동은 아픔이었고 성지였다. 난 대학1학년 겨울에 서클 선배, 동료 몇 명과 망월동으로 야영을 갔다. 묘역 사이에 텐트를 치고 우리는 지난 삶을 이야기하고 다짐했다. 망월 영령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다고. 눈물로 소주를 나눠 마시고 당시의 무기인 꽃병을 만들어 투척하는 실기연수(?)를 한 후 학교인 풍향동까지 걸어서 새벽을 나왔다. 그때의 선배와 동료들은 그 날을 기억할까? 그때 같이 했던 동료 한 명은 지금도 거기 망월묘역에 누워있고 나중에 내가 데려간 후배 녀석도 거기에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잘 살고 있다.

 

영화 26년 두레에 참여했다. 이 만화를 영화로 만들기 위한 시도는 모두 네 차례나 있었지만 번번이 좌절되었다. 돈 때문이었다. 다행히 많은 사람들의 십시일반으로 제작이 진행 중이다. 늘 마음에 두었었는데 이 책을 읽고서야 게으른 실천을 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팩션(팩트+픽션)형식이다. 사실에 근거하여 허구를 입힌 이 장르는 읽는 이에게 둘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들게 하며 작품으로 끌어들인다. 26년 전 부모 중 한명을 잃은 아이들이 성장하여 원한을 갚기 위해 당시의 권력자를 암살하려는 내용이다. 연희동으로 [전두환 체포조]를 파견하는 일은 80-90년대 대학가의 5월 연례 행사였다. 작가 강풀은 90년대 학번으로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재구성한 듯하였다. 3편으로 이루어진 만화는 탄탄한 스토리 덕에 인터넷 연재 당시 200만 조회라는 기록적인 관심을 받았다. 영화 같은 스릴, 번잡스럽지 않은 깔끔한 그림들, 무엇보다 시대를 제대로 증언하기 위한 사실 자료의 탄탄함으로 만화 이상의 가치를 부여받는다. 참 재미있는 만화책이다.

 

개인의 망각은 치매라는 치명적 결말에 이르고, 집단의 망각은 역사의 후퇴를 부른다. 가장 무서운 것이 망각이다. 주요 대선 후보의 역사 인식이 한창 뉴스거리다. 혹자는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미래를 보자고 역설한다. 수많은 과거가 현재와 미래가 됨을 모른 체하는 몰염치이자 무지이다. ‘29만원’짜리 찌질한 독재자가 역사를 우롱하며 떵떵거리는데 미래만 보자는 그들에게 주인공 미진이 날린 마지막 총알은 과연 어디에 닿았을까? 성공여부는 오늘을 사는 우리의 부릅뜬 눈에 달려있다. 장규야! 역사를 잊지 말자.

2012년 9월 22일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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