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91나의문화유산답사기7-유홍준

짱구쌤 2012. 12. 31. 10:18

 

돌멩이 하나, 꽃 한송이도 건드리지 마라!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7 / 유홍준 / 창비 ]

1988년 처음으로 제주에 갔을 때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통일 문구가 적힌 티셔츠 덕에 억류되었다가 이륙 5분 전에 겨우 타고 도착한 제주공항은 야자수 가로수만으로 충분히 이국적이었다. 택시 기사의 낯선 사투리를 들으며 제주교대로 달리는 차창 밖으로 짙푸른 바다와 야트막한 검은 돌담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아까의 불심 검문과 억류로 망쳐진 기분은 금새 어디로 사라지고 사진과 방송에서만 존재했던 제주에 온 것이 너무 행복했었다. 12, 그것도 교대협(전국교육대학생대표자협의회) 집행위원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건조한 일정이었으나 저녁 제주 바닷가에서 참 순박하게 말하는 그곳 대학생들과 마신 소주는 잊혀 지지 않는다. 선한 사람들이 사는 아름다운 섬. 첫인상이었다.

 

우리시대의 문화전도사 유홍준이 제주도 답사기를 펴냈다. 人生到處有上手를 유행시킨 6권을 낸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이렇게 두터운 책을 낸 것이다. 본문에도 나오지만 교수님은 언제 공부하세요?”, “이렇게 돌아다는 것이 공부요!”, “그러면 책은 언제 쓰고요?”, “유아바타가 쓰지요.” 정말 아바타가 있나보다. 앞으로도 충북과 경기, 섬과 일본 속 우리문화 책을 낸다고 하니 구라가 아니라 구다(句多)’라 불러야할 것 같다. 유홍준은 지금껏 그랬듯이 이번에도 속살과 이면을 보여주려 애를 쓴듯했다. 제주인들의 역사와 삶이 녹아 있는 자연과 문화에 방점을 두었기에 그간 우리가 제주를 수없이 찾았어도 눈길 제대로 주지 않은 곳이 대부분이다. 다행스럽게 서명숙이 만든 올레길 때문에 용두암과 천지연 폭포말고 오름과 돌담이 오롯한 제주의 진면목에 주목하게 되었다.

 

몇 년 전부터 4.3 답사와 저어새 탐사를 위해 제주를 찾았고, 올 초 가족들과 제주의 다른 곳들을 둘러보았다. 유홍준 만큼은 아니어도 남다른 식견을 가진 막내 외삼촌 덕분이었다. 처음 오른 용눈이오름은 놀라웠다. 몸을 가눌 수 없는 강풍을 이기고 야트막한 정상에 올랐을 때 펼쳐진 분화구는 유홍준의 표현처럼 원형경기장보다 몽골 초원 같았다. 연달아 이어진 세 개의 분화구(제주어로는 굼부리)는 환상적인 곡선이었는데 작가들은 여체의 아름다움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 용눈이 오름의 아름다움에 천착하여 수십 년을 찍은 이가 김영갑이다. 이미 고인이 된 그가 만든 사진미술관 [두모악]은 폐교를 개축한 것이다. 바람 불고 눈보라치는 겨울날 오름에 올라 산담만이 유일한 인공구조물인 그곳에서 자연의 광활함에 마주 선 한 남자의 처연함이 자꾸 눈에 밟혔다. 차츰 병들어가는 몸으로 마지막까지 미술관을 만든 그의 손길이 오롯이 느껴지는 [두모악]에 다시 가고 싶다. 그곳에서 구입한 엽서가 현관에서 매일 나를 맞는다.

 

본향당, 육지의 서낭당(성황당) 역할을 하는 신당이다. 특별한 구조물이 있지는 않고 오래된 마을의 수호에 단촐한 재단을 갖추었다. 제주 마을 어디에 가든 존재하는 본향당은 육지의 그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제주 여인네들의 영혼의 동사무소, 주민센터라고 불리는 본향당은 자기 삶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와서 신고한다. 출산, 취직, 진학, 돈 번 일, 농사 망친 일, 자동차를 산 일 등.. 신과 독대해서 하는 고해성사의 자리이다. 가난한 사람은 초 한자루만 켜도 되지만 잘 사는 사람은 비단과 오색 천, 갖가지 옷을 준비해 와야 한다. 제주의 자랑인 거상 김만덕 여사의 베품이나 유달리 제주에 많은 출향민들의 기부가 혹시 본향당이 가진 공동체 정신에 기인한 것은 아닌지 분석한다. 일리가 있다. 지난 여름 찾은 강정마을의 본향당에서 미신이네하며 으스스하고 습한 그곳에 발도 들여 놓지 않고 멀리서 조망했던 생각이 나서 스스로 쑥쓰러웠다.

 

역시 유홍준답게 제주의 사람들이 빠지지 않는다. 9년 유배를 산 추서 김정희, 고달팠지만 가장 행복한 서귀포 세월을 산 이중섭, 외지인이지만 제주를 사랑하고 제주학을 정립한 나비박사 석주명과 일본인 학자 이즈미 세이이찌, 제주화가 강요배, 작가 현기영, 그리고 제주의 참주인인 해녀들까지 그의 애정이 넘친다. 저자는 박물관과 국립공원 일부에서 벌어지는 무료입장에 대해 비판적이다. 문화적 가치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일정의 댓가가 필요하다는 것, 그간 아이들을 여러 문화답사 현장에서 가르쳐본 경험으로도 동의하는 바가 크다. 선조들의 훌륭한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은 영화감상료 수준은 지불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한다. 문화재청장을 거친 저자답다.

 

올해 2012년 여름 12일 짧은 일정으로 다시 찾은 제주에서 강정마을을 해군기지로부터 지키자는 평화대행진을 했다. 강정에서 시작해 제주의 반틈을 적시는 강정천의 발원지인 냇길이소는 참 아름다웠다. 그곳에서 평화를 지키는 문정현 신부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바램은 하나였다. “돌멩이 하나, 꽃 한송이도 건드리지 마라!”. “옳소”. 저자도 그렇다.

2012929일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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