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만 보고 달려온 당신에게
[ 게으른 산행2 / 우종영 / 휴 ]
어제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기자의 강연을 들었다. 말지 기자시절부터 익히 여러 알고는 있었으나 대면은 처음이다. 유쾌한 말솜씨는 글을 능가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은 두 가지 말은 “나는 지금도 가슴이 뛰는 삶을 산다.”와 “쉬고 싶을 때는 좀 쉬자.”였다.
게으름은 앞만 보고 달려가는 도시인들에게 상비약 같은 것이어서 게으름을 피우는 동안 무얼 했을까 돌이켜보면 열매를 잘 맺던 나무가 해걸이를 하듯 내면의 에너지를 충원하고 숨고르기를 했다. (이하 붉은색 글은 책 인용)
이 책의 저자 우종영은 우리나라 최고의 나무의사다. 특별한 학력이 없는 그가 삶을 포기하려고 오른 북한산에서 굳건히 서있는 나무의 소리를 듣고 나무의사가 된 것이다. 그의 나무와 숲에 대한 사랑은 책의 도처에 나타나는데 선운사 입구에 있는 덩굴식물 ‘송악’, 천살을 먹었을 조계산 곱향나무, 백양사의 고불매, 대둔산의 붉가시나무 등 우리 산하 곳곳에서 수 백 년에서 천년 이상을 살아온 고목을 해마다 설 세배하듯 찾아다니며 안위를 돌본다. 자신을 삶의 밑바닥에서 건져내 이 땅 나무 지킴이로 지내기까지, 그는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나무에게서 배웠다.”라고 고백한다.
저자가 말하는 게으른 산행이란,
게으른 산행은 숲의 뭇 생명을 존중하는 산행이다. 천천히 걸으며 그들과 눈을 마주치며 안부를 묻고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움에 경의를 표한다. 그렇게 걸으면 숲도 보고되고, 몸에 쌓여 있던 피로물질이 사라져 어느새 마음에 평화가 깃든다. 숲의 치유효과다.
난 게으르게 산행을 하지 않는다. 일단 시작하면 정상을 향해 쉼 없이 오르는데 막상 정상에 오르면 잠깐 조망을 하고 곧바로 내려온다. 자동차로 유적지를 답사하는 것과 흡사하다. 저자가 보면 참 한심한 산행일 것이다. 이 책은 제주도의 오름에서부터 위도 37도 이남의 산을 다룬다. 우리 지역의 조계산, 대둔산, 백암산, 달마산, 지리산 등 대부분 다녀온 곳이어서 옛 기억을 더듬으며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수정난풀이 최초로 엽록소를 버리기 시작했을 때 얼마나 떨렸을까 상상해 본다. 엽록소는 식물을 상징하는 것인데 엽록소를 버리고 잎까지 퇴화시켜가며 빛으로부터 초연하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킨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울릉도에서 만난 수정난풀은 잎줄기 모두 흰색이다. 오랜 기간 생존을 위해 진화해온 꽃에 대한 찬사다. 요즘 나에게 가장 많은 힘을 주는 것은 집에서 기르는 다육식물 화분들이다. 작년 봄에 화원에 들러 예쁜 화분에 심어 들여온 다육이는 지금 참 잘 자란다. 물론 물을 거의 줄 필요가 없는 식생조건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화분에 옮기면서 “우리 다육이들은요, 얘네들은, 그 친구는...”라고 말하던 주인 아주머니의 나무 사랑을 보고 애써 돌본 까닭이기도 하다. 심지어 저자는 그토록 애정을 갖는 오래된 나무들을 괴롭히는 겨우살이도 원망하지 않는다. 고목들에 치명적인 것이 겨우살이인데 이들이 양분을 다 앗아가 버리면 가지는 말라 부러지기 일쑤이다.
그렇다고 겨우살이를 미워하지 말자. 그도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을 따름이니까. 해충이나 병균, 잡초라 불리는 것들은 인간과 경쟁관계에 놓이게 될 때 인간이 편의상 붙이는 이름에 불과하다.
나무의사 우종영의 이 책은 참 아름답다. 아름다운 우리말이 곳곳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다보록하다탐스럽고 소박하다, 굄받이귀염둥이, 미추룸한젊고 건강하여 기름기가 돌고 이름다운 태가 있음, 동산바치원예사, 굴퉁이겉모양은 그럴듯하나 속은 보잘 것 없음, 이슬바심이슬 낼힌 풀섶을 헤치며 걸음, 담숙한포근하고 푹신한
또한 식물도감처럼 딱딱하지 않고 문학 작품을 읽는 듯 유려하다.
달마산을 걷다보면 나무들에게 위로를 받으면서도 징징거리며 따라오는 또 하나의 나를 발견한다. 오래된 붉가시나무 숲은 마치 엠보싱 화장지처럼 올록볼록하다. 이런 숲을 오래도록 바라보면 일상생활에서 주로 평명을 보느라 지친 눈의 피로가 쉬이 풀린다. 산은 춤추듯 너울거리며 서리서리 얽혀 흐르다 바다로 곤두박질치고 산맥이 끝나는 곳의 코숭이산줄기의 끝들은 망망대해의 망루처럼 솟아올라 대양을 굽어본다. 어쩌다 안개에 휩싸일 때면 마치 신기루처럼 물 위에 떠 있는 듯하다. 연분홍 진달래는 봄의 끄트머리에 핀다. 여름이 도적처럼 기다리는 마지막 날에
정말 그는 자신이 알아야할 모든 것을 나무에게서 배운 듯 했다.
나무를 무척 사랑하는 그에게 나무를 혹사시키는 개발은 자신을 향한 고문과도 같다. 콘크리트로 둘러싼 가로수, 철사줄로 동여맨 울타리 나무... 하지만 그를 두고 두고 흐뭇하게 하는 나무가 있으니 바로 경북 안동의 용계리 은행나무이다. 700살이 된 이 나무는 댐 건설로 수몰된 위기에 처했으나 1990년 당시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사상 유래 없는 대이주 작전을 통해 15미터 위로 옮겨졌다. 무려 30억 이라는 거금을 들인 공사가 당시 가능했다는 것이 저자는 두고 두고 뿌듯하다. 지금 우리는 700살 된 나무에게 30억을 들일 수 있는가?
이쯤에서 간식을 먹는다. 나는 산행을 할 때 지치지 않도록 배고프기 전에 미리 먹고, 피로감을 느끼지 전에 쉰다. 이것만 지키면 아무리 먼 길도 룰루랄라 즐기면서 다닐 수 있다.
이 책의 묘미는 이처럼 곳곳에 숨어있다. 좋은 산행 코스를 메모해 두었다. 선암사와 송광사 종주길, 완도수목원의 비자나무숲, 달마산..
사람은 나무를 키우고 나무는 사람의 영혼을 키운다.
이 정도까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무와 풀이 위로가 되어준다는 데에는 이르렀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베란다 작은 화단과 화분, 수조 속 수생식물에 첫 마음을 준다. 늦은 저녁 불과해진 술 낯으로 들어와도 녀석들을 살피며 안심한다. 잘 자라는 모습에 위안을 받는다. 처음에는 활짝 핀 꽃만 기다렸지만 이제는 이파리의 자람이 더 좋다. 저자도 그런 적이 있었는지,
세상에 철모르는 과일만 먹더니 이제 수백년 된 고매앞에서 때이른 꽃을 내놓으라 한다.
참 일 잘하는 믿음직한 젊은 후배와 함께 일하고 싶어서 몇 번을 부탁했었는데 정중하게 거절하였다. “선배님! 조금 쉬고 싶네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두말없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 가끔 보내주는 사진 속 그 후배는 가족들과 행복해 보였다. 내 일처럼 기쁘고 오졌다. 바삐 살아온 그네들에게 내가 할 수만 있다면 “살살해. 쉬기도 하고” 해주고 싶다.
달팽이 뿔 위에서 무엇을 다투는가
부싯돌 불빛 같은 짧은 인생이거늘
부해도 가난해도 기쁨인 것을
하하 웃지 않으면 그대는 바~보. -당나라 시인 백낙천
2012년 9월 9일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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