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343

작별하지 않는다

고통에 도달하는 길은[ 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 문학동네 ]  이런 차분함이라니노벨 문학상이 발표되고 한 달이 지났다. 초기의 독서 열풍은 조금 식은 느낌이지만 호들갑스럽지 않고 차분해서 좋다. 수상자는 딱 한 번 노출되었을 뿐 잠적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덩달아 사회도 가만히 수상 의미를 살펴보고 조용히 작품을 읽으며 기다리고 있다. 덕분에 나도 놓았던 책을 읽으며 고통스럽다. 무임승차는 없으며 ‘고통에 도달하는 길은 오직 고통뿐’이라는 평론가의 말에 수긍한다.어떤 고통은 어줍잖게 알아서 문제이고, 또 어떤 고통은 두려움 때문에 닿을 수 없다. 나는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어서, 이런 차분함과 지연된 축제가 아니면 짐짓 모른 체 넘어가고 말았을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나와 같은 부류의 독자..

책이야기 2024.11.21

소년이 온다

책 한 권 마주하지 못하고, 뭔 쯧쯧 지독한 사람, 한강“고단한 날에도 한 문단이라도 읽고 잠들어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작가의 인터뷰는 뻔하지 않았고 그중에서도 이 문장은 특별했다. 자신은 쓰는 사람이지만 읽는 사람이기도 하다는, 그래서 아직 읽히기를 기다리는 많은 책이 꽂혀있는 서재를 사랑한다고 했다. 이 책은, 나 역시 무척 사랑하는 내 서재에서 무려 9년간이나 읽히기를 거부당하다가, 노벨상이라는 무게에 놀라 허겁지겁 꺼내어 2주의 사투 끝에 마침내 읽게 되었다. [채식주의자]와 거의 같은 시기에 접했지만 읽기가 무척 어려웠던 그 책의 여파에 광주를 다루고 있다는 사전 정보가 겹쳐 늘 책꽂이에만 꽂혀있었다.작가는 지독한 사람이다. 관련된 모든 자료를 찾아 읽고 나니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았고, 일..

책이야기 2024.10.23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11년 전 이곳에서 3학년 담임을 했었다. 2년의 교육청 파견, 4년의 공모 교장을 거쳐 6년 만에 돌아온 교실은 친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교장을 하면서도 주당 4시간 정도의 수업은 해왔던 터이지만 한 번씩 들어오는 선생과 종일 씨름해야 하는 담임은 완전히 달랐다. 3개월이 지나니 낯섦은 희미해졌지만 힘듦만은 여전히 굳건하다. 저자는 뉴욕의 전도유망한 잡지사에서 일하다 갑작스러운 형의 죽음으로 직장을 옮긴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기 싫었고 그냥 자리에 머무르고 싶었다. 오래전 가족들과 찾았던 메트의 기억을 떠올렸고 별 고민 없이 그곳의 경비원이 되었다. 세상 가장 아름다운 것만 모이는 곳에서 자리를 지키며 수많은 명작과 사람들을 만나 10년을 보낸다. 행복한 치유의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전직이라는 방아쇠..

책이야기 2024.06.13

인생은 너무도 느리고 희망은 너무도 난폭해

프랑스 문학의 앙팡 테리블 「브람스를 아세요」, 「슬픔이여 안녕」을 쓴 프랑수아즈 사강은 순식간에 세계적인 작가로 명성을 얻은 ‘매혹적인 작은 악마’다. 신경 쇠약, 수면제 복용, 정신병동 입원, 마약 복용, 그리고 노년의 파산. 20살 즈음에 얻은 명성과 부를 평생 유지하기엔 그녀는 너무 어렸고 열정적이었다. 누구나 그렇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아직도 많이 인용되는 그녀의 명언(?)이다. 이 책은 갑작스러운 명성에, 유럽과 미국, 전 세계로 이어지는 강연과 초청, 연일 이어지는 파티와 여행 중 그녀다움을 붙잡고 싶어, 친구인 베로니크에게 보낸 편지 모음집이다. 그러니까 빨리 편지해 줘, 최대한 길게 답장해 줘 모두 서른아홉 통의 편지글이다. 서로를 플릭, 플록으로 부르며 써 내려간 편지..

책이야기 2024.02.21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우주를 만들어 간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

무해한 사람들, 선한 사람들 언제 회신될지 모를 신호를 우주에 흘려보내며 온 우주에는 과연 ‘우리뿐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과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 자연 그리고 우주를 동경한다. (작가의 말 중) 정말 혜성같이 등장했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저자 심채경은 행성과학자다. 목성, 토성, 수성, 타이탄을 거쳐 지금은 달을 연구하고 있다. 현대의 천문학자는 하늘보다는 모니터를 보는 시간이 훨씬 많다는 사실과 함께, 그가 정말 만만치 않은 내공을 가진 과학 저자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주를 연구하고 사랑하는 ‘무해한 사람들’이란 말 속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는데, 나와의 공통점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분야라 더 신기했다. 언젠가는 터트릴 거라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아이들의 오늘을 사랑하고..

책이야기 2023.10.25

버티는 것과 견디며 나아가는 것

노벨문학상 2023년 노벨문학상은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가 받았다. 매번 수상 후보에 올랐다는데 나에겐 ‘듣보작’이다.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노벨상을 주는 건지 따지고 싶은 마음과 적어도 노벨문학상 작품 정도는 읽어야지 하는 부러움에 곧바로 책을 구입했다. 작가 정여울의 추천사처럼 ‘심각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도, 위대한 인간이 등장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름답고 눈부신 이야기’를 특별한 언어로 이야기한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침묵과 리듬의 글쓰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얼핏 이해가 될 듯도 싶다. 등장인물들의 짧은 대화에는 늘 침묵이 놓여진다. 독자는 그 사이에서 숨죽여 다음 대화를 기다린다.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글의 힘이다. 노르웨이 어느 섬에 사는 평범한 어부 요한네스가 생의 마지막 날 아침부터..

책이야기 2023.10.15

더운 나라 사람들은 게으르다?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 장하준 / 부·키] 편견 넘어서기 전라도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한다 더운 나라 사람들은 게으르다 아이들은 잘해주면 기어 오른다 이슬람교는 배타적이다 지금껏 사실인 것처럼 들어온 말들이다. 직관적으로도 거부 반응이 있었지만 경험하고 공부할수록 더더욱 편견에 사로잡힌 거짓임을 알게 되었다. 가령 ‘전라도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한다’는 특정 지역을 폄훼하기 위한 악의적인 선동이니 논외로 치고, ‘아이들은 잘해주면 기어오른다’는 교육을 일방적인 훈육으로만 여기던 것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권위주의적인 시각이다. 아이들은 존중받을수록 스스로 나아지려고 노력한다. 이 책의 저자는 경제학적 관점에서 편견을 파헤친다. 더운 나라 사람들이 야자나무 아래에 누워 코코넛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린다..

책이야기 2023.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