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채식주의자

짱구쌤 2018. 1. 20. 12:32

 

 

상대 아이는 몸으로 때리고 **은 말로 때려요

[ 채식주의자 / 한강 / 창비 ]

 

나만의 아지트

근사한 아지트를 갖고 있다. 집에서 가까워서 걸어 갈 수 있고, 갤러리를 겸하고 있어 수준 높은 미술 작품을 언제든지 볼 수 있다. 나의 촌스러운 커피 취향을 잘 알고 있는 주인 덕에 시럽을 넣는 수고도 아낄 수 있고, 무엇보다 손님이 많지 않다는 장점(?)이 있는 곳이다. 순천 제일의 오디오는 언제든 최고 수준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갤러리 카페 [루카스].

어릴 적 아지트처럼 편해지는 곳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희귀한 순천눈구경을 위해 찾았는데 눈은 그치고 창가에 놓인 이 책만 읽다 왔더랬다. 그렇게 세 번에 걸쳐 카페에서만 읽은 책이다. 아내가 사다 놓은 작가의 책 [소년이 온다]는 늘 뒷전에 밀리곤 했는데, 식품학을 전공한 카페 주인장의 취향이 엿보이는 이 책 덕분에 한강이라는 작가에 주목하게 되었다. 요즘 집에서는 책만 보면 잠이 오는데 반해 좋은 음악과 향 좋은 커피 때문인지 책은 그냥 술술 읽혔다.

 

채식주의자

세 개의 중편이 실려 있다. 모두 독립적이지만 하나의 이야기로 얽혀있다. 꿈 때문에 채식주의자가 된 영혜의 남편 시각에서 쓴 글이다. 평범하기만을 바라던 아내의 갑작스런 채식주의 선언은 급기야 가족 모임에서의 자해 사건으로까지 이어지며 파국을 맞는다. 결코 미친여자와는 살 수 없다며 이혼을 요구하는 남편, 딸의 일탈을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손찌검까지 하는 아버지는 모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를 가두는 우리들이다. 영혜의 그 꿈이란 것도 어릴 적부터 빈번했던 아버지의 폭력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상징하는 육식, 그것을 거부하는 채식은 소극적인 회피로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강력한 저항이다. 우리 사회가 쌓아놓은 견고한 장벽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우회하거나 돌파하는 것인데, 두 가지 모두 무척 어려운 일이다. 채식은 우회의 방법처럼 보이나 실상은 돌파에 가깝다. 육식 문화의 틈바구니 속에서 채식을 고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가정에서야 일정정도의 고비를 견디면 되지만 직장과 사회에서의 고집은 상당한 외면과 따돌림을 감수해야 한다. 주인공 영혜는 가족에게서 조차도 보호받지 못하는 외톨이다.

 

몽고반점나무 불꽃

사실, 나는 작가의 파격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몽고반점에서의 비디오 아티스트 형부와 극단적 채식주의자 처제의 전위 예술(?)도 그렇고, ‘나무 불꽃에서 진짜 식물이 되고자 하는 영혜의 아픈 선택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다만 그렇더라도 살아가는언니 인혜가 있어 위안을 받는다. 자매가 어릴 적에 아버지로부터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더라면, 결혼 이후라도 자매가 그 반려와 깊이 교감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만 가득하다. 사실 가르치는 업을 가진 선생으로 상당한 채식주의자들을 매일 만난다. 사회 통념상 이단아, 부적응아로 불리는 아이에서, 가장 필요한 사랑을 그 시기에 충분하게 받지 못하는 아이들까지. 나는 육식이라는 안전한 울타리 속에서 채식주의자들을 바라본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똘레랑스를 발휘한다. 너의 그것은 그것대로, 나의 이것은 이것대로 공존하자는, 딱 거기까지만 말이다. 똘레랑스가 결코 근대의 가치가 될 수 없다던 어느 철학자의 주장에 공감한다.

어느 대안학교 담임 제비꽃마리 선생님께 보내는 한 아이 엄마의 살가운 편지는 내가 채식주의자들을 대하는 자세가 될 법 하였다.

 

제비꽃마리 선생님

선생님은 **이 했던 싸움에 대해 이런 말도 했다. “상대 아이는 몸으로 때리고 **은 말로 때려요.” 선생님의 시선이 아이들의 행동을 세심하게 살피고 있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에 대해 선생님과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를 떠올린다. “1학년 때와 비교해서 지금 어떤 점이 가장 많이 달라졌나요?” 내 질문에 선생님이 답했다. “**의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예뻤어요. 곱고 여리고 따뜻한 기질을 가졌죠. 달라진 점이라면 고슴도치처럼 바짝 긴장해 다가오는 사람을 찔러대던 가시가 이제는 강아지 털처럼 부드러워진 거예요.” 아이를 섬세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찡했다. 아이들은 그 선생님을 제비꽃마리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한겨레21. 2018. 1. 16)

 

나만의 아지트가 계속 남아 있기 위해서는 일정 정도 잘 되어야 하지만 너무 잘되면 아지트로서 가치가 사라질 수 있어 고민이다. 그래서 조심스레 지인들에게 소개한다. 주인께는 죄송스럽지만 아지트를 가진 이들은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래도 지금보다는 더 잘되었으면 좋겠다.

채식주의자.hwp

2018120일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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