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세여자1,2

짱구쌤 2018. 2. 5. 20:41

 

 

12년 숙성한 세 여자 이야기

[ 세여자1,2 / 조선희 / 한겨레출판 ]

 

단발랑 트로이카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

19258월경 청계천에 세 여자가 발을 담그고 있다. 한 명도 보기 어려웠던 시대에 동시에 세 명이나 단발을 했으니 상당한 구경꾼들이 모여들었을 것이다. 사회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로 살다간 세 여자,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가 주인공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식민지 조선에도 공산주의운동를 태동시켰다. 지식인 대부분이 막시즘의 세례를 받았으니 신여성인 이들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주세죽. 조선노동당의 최고 이론가이자 실천가인 박헌영과 결혼. 그가 검거되자 모스크바로 망명하여 남편의 동지 김단야와 재혼하지만 일본 밀정 혐의로 카자흐스탄에 유배형을 받았다가 모스크바에서 병사한다. 소련의 보육원에서 키워진 그녀의 딸이 1991년에 한국을 방문하면서 공개한 사진이 바로 세여자이다.

허정숙. 조선 최초의 변호사인 허헌의 딸이자 북한 문화상과 부수상까지 거쳤다. 중국 팔로군에 소속되어 마오 주석과도 막역하고, 네 번의 결혼이 말해주듯 자유연애를 실천한 여걸중의 여걸이다. 평양에서 91세를 누렸으니 세여자 중 가장 성공했다고 할 수도 있을까?

고명자. 셋 중 가장 어리다. 부유한 지주의 외동딸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라다 우연히 두 여자를 만나 삶의 격랑에 휩싸인다. 그녀로 인해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사랑하던 연인 김단야도 떠났으며 투옥과 고문 끝에 전향을 하고 해방을 맞았으나 두 체제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하고 경성에서 객사한다.

 

박헌영, 김단야 그리고

세 여인의 주변에는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스타들이 포진되어 있다. 단연 발군의 박헌영은 물론 코민테른이 인정한 조선의 혁명가 김단야, 그리고 최창익이 그들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들 혁명가들은 말년에 모두 미국 스파이, 일제의 밀정, 종파주의자라는 이름으로 제거된다. 그들 스스로 목청껏 외쳤던 종파와 주의의 덫에 걸려 희생된 것이다. 거친 해방 정국에 등장하는 남북한의 정치인들-김구, 여운형, 김일성, 박헌영, 송진우, 김규식, 조봉암 등-은 모두 어느 편에는 서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은 이들은 여성들이었다. 많지 않은 경험이지만 직장에서건 사회에서건 편을 나누고 패를 짓는 것은 남성들의 몫이었고 여성들은 유연하고 두루뭉술했다.

맹목적으로 자신을 정의로, 타인을 불의로 설정하는 지점에서 역사의 비극이 싹튼다. 미국과 소련이 남과 북을 점령한 것은 분단의 시작일 뿐이었다. 분단을 완성한 것은 어리석음과 아집과 독선이었다. 극악한 식민지 상태에서 갓 벗어난 사람들에게 대화와 타협의 매너를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관대함과 현명함의 미덕은 굶주림과 인권유린이 없는 환경에서 훈련되는 것이다. (174)

해방 정국에서 우리 민족이 보여준 극렬한 좌우 대립을 안타까워하며 쓴 글이다.

 

 

고은광순, 서명숙, 조선희

세상의 모든 언어로 말하고 싶었고 이 세상 모든 항구에 정박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알고 싶었고 모든 것이 되고 싶었다.’ 던 정숙의 독백처럼 숨 막히던 식민지 조선에서 세 여인은 너무 일찍 태어났다. 주세죽(함흥-상해-경성-블라디보스토크-모스크바-크질오르다), 허정숙(경성-고베-상해-모스크바-뉴욕-타이페이-남경-무한-연안-평양), 고명자(경성-상해-모스크바) 삶의 여정이 눈부시고 어지럽다.

후세에 이들만큼은 아니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언니들이 모여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는다. 호주제폐지의 여걸 한의사 고은광순, 제주올레를 만든 영초언니의 서명자, 그리고 세 여자의 저자 조선희. 인공연못으로 바뀐 청계천에서 100여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건만 세상의 모든 항구에 정박하고 싶다던 정숙의 꿈은 이뤄진 것일까?

식민지와 해방, 한국전쟁을 관통하는 우리의 근대사를 이처럼 명쾌하게 보여준 역사소설은 많지 않았다. 한겨레와 씨네21의 명기자로만 알았던 작가의 진면목을 보았다. 12년을 두고 기록한 소설이 마침내 숙성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어설픈 재주와 설익은 조급함으로 출간을 서두르던 차에 좋은 복병을 만났다. 곰삭을 만큼은 아니더라도, 지금 필요한 것은 충분한 시간이다. 요즘에는 여인들에게 더 많이 배운다.

세여자1,2.hwp

201826일 이장규

세여자1,2.hwp
0.36MB

'책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0) 2018.02.27
열한 계단  (0) 2018.02.21
나, 건축가 구마 겐고  (0) 2018.01.23
채식주의자  (0) 2018.01.20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0) 2018.01.10